무신정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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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무신정권의 형성과 그 성격
1 무신난 이전의 시대상황
2. 무신난의 원인에 대한 연구동향
3. 무신정권의 성격에 대한 연구동향
4. 무신정권의 변화와 그 성격
1)성립기
2)확립기
3) 붕괴기

Ⅱ. 고려와 몽고와의 관계
1. 대몽항쟁기
2. 원 간섭기
3. 고려 말의 여․원관계

본문내용

강조했다.
2. 원 간섭기
1)원의 고려지배
원의 고려 지배방식은 원 세조 쿠빌라이가 천명한 <以漢法治四夷 不改土風>의 원칙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배방식은 천자와 제후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의례관계와 전통적인 화이관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 위에 있다고 하나 원은 고려 국왕을 그들의 직접적인 통치권의 범위 내에 묶어 원의 고려지배는 정치, 군사 등의 측면에서는 역대 어느 이민족보다도 예속의 강도가 높았다.
우선 원 간섭기의 전기간에 걸쳐 고려의 국왕들은 즉위하기 전 원에서 숙위 하여야 했으며 원의 부마가 되어야 했다. 또한 원은 고려왕이나 왕족을 만주지방에 설치된 7路·1府의 하나인 심양로의 심양왕에 봉해 고려왕을 사실상 원의 제후왕으로 봉했다. 원의 제후국으로 격하된 고려 국왕은 조(祖)나 종(宗)과 같은 묘호를 사용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대신 원의 제후왕들이나 재상들이 사후에 부여받는 충(忠)자를 포함한 묘호를 원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또한 국왕의 의복·의식·용어 등 제후의 격식으로 격하되었고, 각종 행사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용어들도 제한 받았다. 또한 원 제국내의 반 고려세력들에 의해 독립국인 고려를 원의 내성으로 편입해 관리하자는 입성론(立城論)이 제기되었으며, 이후 입성론은 고려내 부원세력들에 의해 정략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원 조정은 고려를 독립국으로 존속시킨다는 기본방침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
원은 삼별초 진압과 뒤이은 일본원정을 목적으로 정동행성을 설치한 후 이를 통해 고려의 국정 전반을 간섭하였다. 1307년에는 정동행성관의 증치를 통해 원은 관리를 직접 파견해 고려에 대한 통제·감시 기능을 강화했다. 정동행성은 비록 형식적 기관의 성격이 강했지만 원의 직속기관으로서 소속관리들은 치외법권적 권리를 가졌다. 이들은 이러한 지위를 바탕으로 원 황실이나 원 조정에 항거하는 죄인들을 체포해 원에 호송하기도 했다.
원은 고려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제·관호의 하향개정, 재상인원의 축소, 관료치죄에 대한 원의 사전허가 준수, 경외 관직의 축소 등을 요구하였다. 군사적으로는 다루가치를 설치 원의 군대를 고려 내에 주둔 시켰고,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를 유명무실화 시켰으며, 원의 기본 군제인 만호부(萬戶府)의 형태로 지방군을 창설하여 고려의 중앙, 지방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외에도 고려인의 궁전 소지 금지 및 기마 금지, 제영부(諸領府) 폐지를 통한 군호제 실시, 역참정비 및 원의 관리 파견 등을 통해 고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경제적으로는 말, 각종 특산품과 같은 수많은 공물을 강요했고 권농사를(勸農事) 파견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는 원의 법제를 실시하여 고려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려 했으며, 동성혼 금지 및 통혼 요구, 공녀 요구, 노비제 개혁, 형벌 적용절차 개정을 금지케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p268, p289∼290
2)원 간섭기에 대한 연구동향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원 간섭기를 타율성론에 입각해 고려를 사실상 원의 제후국으로 구분했다. 이들은 정동행성을 비롯한 원이 고려에 설치한 기구들을 예로 들며 고려의 독립성을 부인했다.
박종기는 원 간섭기를 정치적으로는 원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지만 토지소유, 노비개혁 등 사회 하부구조의 경우 상대적으로 거의 완전 독립적이었으며, 원의 고려지배가 고려의 전사회구조에 전면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박종기, 「원 간섭기의 이해문제」, 『14세기 고려사회』, 민음사, 1994, p19
.
주채혁은 고려는 이 시기 사실상 원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원의 분봉지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고려왕실은 원 황실의 외손으로 원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고 보았다.
주채혁, 「몽골·고려사 연구의 재검토­몽골·고려전쟁사연구의 시각문제」, 『애산학보』, 1989
김당택은 원 간섭기의 정치세력을 부원 세력과 이에 반대한 세력으로 구분했다. 초기에는 강력한 원의 영향력으로 인해 부원세력들에 의한 친원정책이 추진되어 고려의 자주성이 심각하게 상실되었으나 이후 원의 쇠퇴와 반원세력의 성장으로 고려는 자주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3. 고려 말의 여·원관계
14세기 중반 이후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켜 1352년에 변발(髮)·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1356년에는 대대적인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원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 : 정동행성)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일파와 권겸, 노책 등 부원세력을 숙청하고, 1358년 이후 100년 간 원의 직할지가 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탈환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明)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69년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하여금 동녕부(東寧府)
1270년 원이 고려의 서경(西京)에 설치한 통치기관으로서, 원은 1290년에 고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들여 이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했다
김상기, 「삼별초와 그 난에 대하여」, 『진단학보』9·10·13, 1939∼1941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9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민현구, 「몽고군·김방경·삼별초」, 『한국사 시민강좌』8, 일조각, 1991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1987
박용운, 『고려시대사 연구의 성과와 과제』, 신서원, 1999
박종기, 「원 간섭기의 이해문제」, 『14세기 고려사회』, 민음사, 1994
변태섭, 「고려조의 문반과 무반」, 『사학연구』11, 1961
이기백, 「고려 군반제하의 군인」, 『고려병제사연구』, 일조각, 1968
변태섭, 「고려후기의 무반에 대하여」, 『서울대논문집 인문사회과학』12,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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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14
  • 저작시기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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