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에서도 있었다. 실은 중국이 6·25 전쟁때 개입할 만한 객관적인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 이면에는 바로 멘쯔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맞았을 경우 그냥 쉽게 물러나 대국으로서의 ‘체면’(面子)을 손상시키기보다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맞붙어 저항하는 행동을 보여왔다. 중국이 건국한 지 불과 1년만에 당시로서는 대적할 상대가 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던 초강대국 미국과 국제연합을 상대로 전쟁을 전개하게 된다. 형제국에 대한 체면이 강했을 것이다.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보면 중국은 쓰촨(四川)과 티베트에서 국민당과 내전을 계속하고 있었고, 수백%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9년 문화대혁명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핵무기 사용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군사충돌을 주저하지 않았던 전바오다오(珍寶島) 사건 또한 중국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아시아가 외환위기를 경험할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위안화(貨)의 평가절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중국인의 의식세계를 조금만 이해할 수 있으면 체면을 중시하고 대국으로서의 면을 잃지 않으려는 그들의 자세에서 눈앞의 이익을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중국은 많은 이웃의 작은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급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통화를 평가절하하지 않음으로써 최대한의 외교적 이익을 얻어냈다.
당시의 중국은 국제사회에 분명한 시그널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과 대조적으로 어려운 경제적 결정을 내릴 줄 아는 나라로 스스로를 각인시켰다.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시장원리를 주장하는 미국의 개입이 합리와 이성이라는 면에서는 타당한 면이 많다. 그러나 인간이란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당시의 국제기구를 통한 미국의 개입이 많은 비난과 반발을 샀던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그런 미국의 개입에 대한 앙금이 아시아권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것도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글로벌라이라이제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혜택과 기회를 가져다준 것도 아니다. 금융자유화로 인하여 많은 나라들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고 전세계적인 단일시장화는 어느 나라이든 변화된 세상이 가져온 실업문제로 인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근원을 논리적으로 따져가다 보면 원인의 상당부분은 어찌할 수 없는 기술의 진보와 각국의 정책 실패에 따른 면이 휠씬 크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은?
그러나 보통사람들로서는 이런 것을 찬찬히 따져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수 없다. 그들에게 절실히 와닿는 것은 당장 과거와 달라진 세상이 자신에게 주는 고통일 것이다. 오늘날 범세계적으로 반세계화에 대한 목소리가 고조되는 것은 미국에 대한 다양한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아시아의 보통사람들은 미국의 문화적 및 경제적 슈퍼파워를 일종의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테면 오만하고 간섭적인 태도를 가진 패권주의 국가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인종주의적 특성을 중심으로 서구와 아시아라는 이분법적 호소가 대(對)미국 관계와 대(對)중국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
지난 9월11일 뉴욕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한국사회의 여론의 향방은 예상하였던 것보다 미국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시 꽤 크게 사업을 하는 어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국인의 정서에는 미국에 대한 상당한 피해의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분은 미국과의 교역을 통해, 그리고 세계화된 세상으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이런 감정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정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미국과 중국은 서로 깊은 세계관의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헤게모니를 둘러싼 본격적이고도 첨예한 경쟁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전개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이를 두고 신냉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완화할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의 유학생은 모두 16만명이다. 이 가운데 3만명 정도가 귀국해 미국과 중국관계를 비롯한 각종 경제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중국 유학생 출신 학자들만 대략 3,000명에 이른다. 이러한 인적교류의 활성화가 미래에 예상 가능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지나친 갈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과 중국이 일부에서 예상하듯 신냉전이라고 부를 만큼 극단적인 모습의 경쟁체제로 접어들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일단 대만문제, 전략미사일방어망 문제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양국이 상당기간 알력과 갈등의 반복을 거듭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도전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한마디로 대중 관계와 대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일정 기간, 예를 들면 20~3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보면 중국이 외형적인 면에서는 미국에 필적한 만한 경제규모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제의 인프라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는 데 휠씬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휠씬 더 긴 시간이란 우리 세대에는 불가능한 시간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한 국가의 번영이란 결코 물적이고 외형적인 투입요소 증가만으로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간과했던 점, 한국이 간과했던 점은 몰라서라기보다 그만큼 제대로 된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좌표는 한·미 동맹관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중국과의 선린 우호관계를 어떻게 존속시켜 나갈 것이냐 하는 점이다.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 그리고 중국경제의 급부상과 그 이후의 상황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략 수립이라는 절실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상대를 맞았을 경우 그냥 쉽게 물러나 대국으로서의 ‘체면’(面子)을 손상시키기보다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맞붙어 저항하는 행동을 보여왔다. 중국이 건국한 지 불과 1년만에 당시로서는 대적할 상대가 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던 초강대국 미국과 국제연합을 상대로 전쟁을 전개하게 된다. 형제국에 대한 체면이 강했을 것이다.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보면 중국은 쓰촨(四川)과 티베트에서 국민당과 내전을 계속하고 있었고, 수백%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1969년 문화대혁명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핵무기 사용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군사충돌을 주저하지 않았던 전바오다오(珍寶島) 사건 또한 중국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아시아가 외환위기를 경험할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위안화(貨)의 평가절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중국인의 의식세계를 조금만 이해할 수 있으면 체면을 중시하고 대국으로서의 면을 잃지 않으려는 그들의 자세에서 눈앞의 이익을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중국은 많은 이웃의 작은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급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통화를 평가절하하지 않음으로써 최대한의 외교적 이익을 얻어냈다.
당시의 중국은 국제사회에 분명한 시그널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과 대조적으로 어려운 경제적 결정을 내릴 줄 아는 나라로 스스로를 각인시켰다.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시장원리를 주장하는 미국의 개입이 합리와 이성이라는 면에서는 타당한 면이 많다. 그러나 인간이란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당시의 국제기구를 통한 미국의 개입이 많은 비난과 반발을 샀던 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그런 미국의 개입에 대한 앙금이 아시아권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것도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글로벌라이라이제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혜택과 기회를 가져다준 것도 아니다. 금융자유화로 인하여 많은 나라들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고 전세계적인 단일시장화는 어느 나라이든 변화된 세상이 가져온 실업문제로 인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근원을 논리적으로 따져가다 보면 원인의 상당부분은 어찌할 수 없는 기술의 진보와 각국의 정책 실패에 따른 면이 휠씬 크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은?
그러나 보통사람들로서는 이런 것을 찬찬히 따져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수 없다. 그들에게 절실히 와닿는 것은 당장 과거와 달라진 세상이 자신에게 주는 고통일 것이다. 오늘날 범세계적으로 반세계화에 대한 목소리가 고조되는 것은 미국에 대한 다양한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아시아의 보통사람들은 미국의 문화적 및 경제적 슈퍼파워를 일종의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테면 오만하고 간섭적인 태도를 가진 패권주의 국가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인종주의적 특성을 중심으로 서구와 아시아라는 이분법적 호소가 대(對)미국 관계와 대(對)중국 관계에 새로운 차원을 가져다줄 수 있다.
지난 9월11일 뉴욕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한국사회의 여론의 향방은 예상하였던 것보다 미국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당시 꽤 크게 사업을 하는 어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국인의 정서에는 미국에 대한 상당한 피해의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분은 미국과의 교역을 통해, 그리고 세계화된 세상으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이런 감정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정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미국과 중국은 서로 깊은 세계관의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헤게모니를 둘러싼 본격적이고도 첨예한 경쟁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전개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이를 두고 신냉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완화할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건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중국의 유학생은 모두 16만명이다. 이 가운데 3만명 정도가 귀국해 미국과 중국관계를 비롯한 각종 경제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중국 유학생 출신 학자들만 대략 3,000명에 이른다. 이러한 인적교류의 활성화가 미래에 예상 가능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지나친 갈등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과 중국이 일부에서 예상하듯 신냉전이라고 부를 만큼 극단적인 모습의 경쟁체제로 접어들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일단 대만문제, 전략미사일방어망 문제 등의 사안에 대해서는 양국이 상당기간 알력과 갈등의 반복을 거듭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도전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한마디로 대중 관계와 대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일정 기간, 예를 들면 20~3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보면 중국이 외형적인 면에서는 미국에 필적한 만한 경제규모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경제의 인프라 면에서 미국을 따라잡는 데 휠씬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휠씬 더 긴 시간이란 우리 세대에는 불가능한 시간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한 국가의 번영이란 결코 물적이고 외형적인 투입요소 증가만으로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간과했던 점, 한국이 간과했던 점은 몰라서라기보다 그만큼 제대로 된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좌표는 한·미 동맹관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중국과의 선린 우호관계를 어떻게 존속시켜 나갈 것이냐 하는 점이다.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국과 미국의 관계, 그리고 중국경제의 급부상과 그 이후의 상황이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략 수립이라는 절실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