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영화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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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영화를 보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 데카메론 IL Decameron

2. 모더니즘적 미학과 정치적 비판주의의 결합 - 장 뤽 고다르 <주말>

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돼지우리>

본문내용

할 수 있는 지름길이 이러한 분열증식적(fassiparous) 성격 속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탈리아인의 기질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무정치적(apolitical)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본가·군부·귀족이 당의 후원자가 되고, 제대한 군인과 도시 및 농촌의 중산계급이 대중적으로 파시스트운동에 참가하였다. 파시스트당은 처음에는 사회주의적 정책을 강조하였으나 곧 국가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되고, 20년 사회주의노동자에 의한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점령이 실패한 이래, 파시스트는 사회주의 조직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당이 우세한 각 도시의 시의회나 시청을 공격·점령하였다. 21년 군부·경찰·관리의 지지를 얻은 그들의 폭력은 대규모적으로 확대되었고, 22년 국내가 거의 내란상태로 변하였다. 22년 10월 27일 무솔리니는 4만 명의 병력으로 결성된 ‘검은 셔츠대’를 이끌고 이른바 ‘로마진군’을 결행하였다. 10월 29일 이탈리아 국왕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결국 로마 진군은 정권접수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행사였던 것이다. 당시 왕당파(王黨派)나 자유주의자·사회당도 안정된 정부를 조직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이탈리아의 권위의 위기와 사회혁명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층계급이 파시스트당에 정권을 물려준 것이었다. 정권을 잡은 무솔리니는, 처음에는 국민들의 확고부동한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24년 총선거에서 전투표의 65 %를 얻는 성과를 올렸으나, 지역적으로 볼 때에 북부지방에서는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게다가 24년 6월 파시스트에 의한 마테오티 사회당의원 암살사건은 파시스트 정권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하였다. 그러나 점차 권력을 강화하여 비밀경찰의 확대, 언론·출판의 통제, 심지어 법령제출권(法令提出權)까지 무솔리니의 동의하에 두게 하여 무솔리니의 정령(政令)은 그대로 법령으로 통용되었다. 25년 파시스트당 이외의 결사를 금지시켰으며, 30년대의 세계대공황은 무솔리니의 영토확장주의의 야망을 표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가장 열렬히 무솔리니를 지지했던 것은 정교조항(政敎條項:concordat)의 조인을 통한 가톨릭교회의 지지였다. 무솔리니 자신은 “내가 말하는 것은 항상 옳다”라고 호언하였고, 국민들은 또한 무솔리니를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로 여겼다. 이때부터 파시즘이 부르주아적 정치운동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대중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40년 6월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잇따른 군사적 패배와 전쟁으로 긴장은 결국 국내에 공황을 야기시켰으며, 히틀러에 대한 맹종(盲從) 등으로 국민적 불만은 파시즘체제를 붕괴시켰다. 43년 무솔리니는 파시즘 대평의회에서 해임되어 왕당파에 의해 체포되고 파시스트당은 해산되었다.
당신들을 지옥과 천국이 마주보는 문으로 안내하겠다. 파솔리니의 영화 가운데 카톨릭 보수파 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 던 작품인 <떼오레마>에서 부르주아 가족은 그리스도 같기도 하고 때로는 악마 같기도 한 신비한 인물 테렌스 스탬프로부 터 성의 향연에 초대 받는다. 그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일까 아니면 천국일까.
1961년 <아카토네>로 국제영화계에 이탈리아의 가장 논쟁적 감독으로 알려지게 되는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그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는 네오레알리슴의 시대를 끝내고 펠리니와 안토니오니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스 트 시네마의 새 장을 열고 있었다 . 그 두 거장에 비하면 파솔리니는 오히려 주변부의 아방가르드였지만, 바로 그 주변성이 그의 영 화를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카로 운 칼처럼 휘번득이게 한다.
이미 50년대에 시인이며 소설가로서 몇 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던 파솔리니는 이탈리 아 지식인의 두가지 짐, 카톨릭 과 그람시의 마르크시즘을 그의 영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도시 빈민들에 대한 그의 애정과 카톨 릭에 대한 재해석은 <마마 로 마>(1962)와 <성마태복음>(1964)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비기독교적 신화에 대 한 매혹과 이탈리아 공산당에 가한 비판 때문에, 카톨릭계는 물론 좌파 역시 그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신비주의에 대한 경도와 마르크시즘적 태도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모순은 파솔리니 영화의 특징이 됐고, 그는 회화, 르포르타주, 연극, 비평 등을 넘나들며 더욱 그 모순들을 다면화했다 . 따라서 더 많은 적들이 생겨났다. 거기다 그의 육체 자체가 일종의 실험실이며, 논쟁의 장이었 다. 뿌리 깊은 카톨릭 사회에서 파솔리니의 동성애 성향은 스캔들 이상의 파문이었기 때문이다. <캔터베리 이야기 >(1972), <쌀로-소돔의 120일>(197 5) 등의 영화에서 그는 과잉적 성과 폭력 그리고 신성모독을 다뤘으나, 오히려 죽음 자체가 역설 적으로 자신의 영화를 재연하는 무대 혹은 장이 됐다.
<떼오레마>에서 테렌스 스탬프는 부유한 이탈리아 가정에 머물며 가족들을 차례로 유 혹하는 역을 맡는다. 그가 하인과 아들, 어머니와 딸,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성 관계를 갖고 떠나자 이들은 모두 서서히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선다. 다양한 현상을 주재하는 추상적 법칙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 <떼오레마>는 바로 이 신비한 손님 을 가리키며 다섯명의 가족들의 운 명은 바로 그에 의해 결정된다. 이 영화에서 성애는 신과 인간의 충일한 관계에 대한 은유이지만, 그 관계는 테렌스 스탬프가 갑 작스레 떠남으로 파괴된다. 랭보를 읽는 테렌스와의 천국의 나날들이 지옥의 한철로 바뀌는 수난 은, 사실 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순간이기도 한 셈이다.
실현되지 않은 약속의 땅을 기다리며 사막과 같은 밀라노에서 몰락하는 한 가족의 우화는 사실 종교와 마르크시즘 사이에서 그리고 네오레알리슴의 유산과 자신의 '신비적 리얼리즘' 스타일 사이에서 동요하는 파솔리니 자 신에 대한 영화적 성찰이기도 하 다. 그리고 그 동요는 노상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다. 1975년 파솔리니를 살해했던 17살의 청년 은 그가 자신을 유혹했기 때문에 죽였노라고 진술했다. <필자: 김소영/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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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24
  • 저작시기2013.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8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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