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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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지리·환경

2. 주민·언어

3. 인도 문화의 특징 - 종교와 카스트제도

4. 인도역사의 시작

5. 새로운 종교의 등장

6. 고대인도의 통일제국

7. 힌두문화의 르네상스와 인도고전문화의 성립

본문내용

특징이다.
하르샤왕과 현장
굽타왕조가 1세기 이상 침체상태에 있은 후 북인도를 평정한 인물이 바르다나 왕조의 하르샤였다(606~647). 그는 무정부상태에 빠져있던 북인도에 질서를 회복시켜 굽타왕조의 세력을 만회하는 듯했다. 그는 관대한 군주로서,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들을 우대하였다. 그가 정복한 왕이 충성과 조공을 다짐하면 그 영토를 되돌려주어 지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나란다 대학을 지원하였다. 인도를 방문하였던 당의 현장은 하르샤의 영토에 8년 동안 머물렀는데, 하르샤는 그를 후대하였으며 먼 여행길에 편의를 보아주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에 매우 호의적이었으면서도 힌두교에 대해서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르샤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귀족과 주지사들이 권력다툼에 휘말려 국가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하르샤의 통치 기간은 현장의 불교 순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현재의 비하르의 날란다에 있던 날란다 불교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수집하게 되었다. 그는 하르샤의 궁중에서 몇 년을 체류하고, 인도를 널리 돌아다녀 본 후 하르샤의 궁중과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은 그보다 2세기 이상이나 앞서서 인도순례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간 법현의 훌씬 풍부하다.
현장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불교는 18개 분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과거의 불교 중심지는 퇴락하였다. 가장 유명한 중심지는 날란다로서, 불교 승려들을 위한 거대한 불교대학을 유지하고, 1만명의 승려학도가 있었다고 한다.
하르샤는 종교 관용정책을 폈다. 그는 초기에는 샤이바, 즉 시바교도엿으나 점차 불교의 위대한 보호군주가 되었다. 그는 쁘라야가에서 큰 불교 집회를 개최하였고, 여기에서는 그의 모든 예속군주들과 각료들과 귀족들이 참가하였다. 이 집회에는 불상이 숭배되었고, 또 현장의 강연이 열리기도 했으며, 마지막 순서로 하르샤가 막대한 보시를 베풀었다. 그는 입고 있는 옷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바쳤다. 현장은 하르샤를 극구 찬양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왕은 친절하고 정중하였으며 그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국의 각지를 방문할 수가 있었다.
이슬람세력의 인도침입
7세기 내지 11세기 동안의 인도에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없었으며, 따라서 외적의 위협에서 성장하는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은 점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오랜 기간의 평화 속에서 부를 축적하게 됨에 따라 경제적 생활은 풍족하였으나 반면에 정치조직은 미약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조 치하의 이슬람교도는 11세기 초부터 인도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하였고, 가즈니조를 대신한 구르조는 12세기 말에 벵골에 이르는 북인도의 대부분을 정복해서 1206년 노예 출신의 부장 꾸툽 딘 아이박이 독립하여 인도에 최초의 이슬람교도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최초의 왕통은 궁정노예가 황제가 되고 궁정·행정·군사의 고위직이 대부분 군주의 노예들에 의해 점유되었으므로 역사에서 이를 이른바 노예왕조라고 부른다.
노예왕조를 멸망시키고(1290) 피루즈 샤가 왕위를 차지하여 킬지왕조를 열었다. 킬지족은 원래 터키계의 일족이었지만 아프가니스탄에 오랫동안 정착해왔다. 다음으로 가지 말리크가 일으켰던 투글락왕조는 데칸에 원정하는 등 상당한 세력을 떨치기도 했지만 다음 무하마드 빈왕이 호사스런 생활을 즐긴데가 기근까지 겹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벵골지방이 이탈되어갔다.
불안한 정세 속에서 힌두왕조 비자야나갈국의 흥기는(1336~1649) 모슬렘세력이 남인도로 확장하는 것을 견제하였다. 이 왕국은 고아, 마이소르, 칸치 등을 포함했으며 그 역사는 주로 북부의 모슬렘왕조와 전쟁하는 것으로 일관되었다.
14세기 말에는 티무르가 델리까지 침입해 들어와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갖은 약탈을 자행했으며 모슬렘왕조는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너나 펀잡의 지배자였던 불룰 칸이 로디왕조를 건설함으로써 쇠약해졌던 모슬렘왕조를 부흥시켰다. 로디왕조의 뒤를 이어서는 바부르가 등장하여 혼란상태를 평정하고 무굴제국을 건설함으로써(1526)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무굴제국
무굴제국의 참다운 건설은 제3대 왕 악바르(재위1556~1605)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그는 우선 주변의 모든 세력을 무찌르고 무굴세력을 확립하는 동시에 황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구축하였다. 이어서 만사브다르제의 창설, 지방제도의 재편성, 징세제도의 개혁을 주축으로 해서 지배체제를 수립하고 구자라트·뱅골 등의 모든 지방을 침략해서 광대한 지역을 영토로 하였다. 악바르 때로부터 그 증손 아우랑제브(재위1659~177)때까지 약 150년간 무굴제국은 번영을 과시하여 장려한 건축물을 세웠으며 상업도 극도로 번창하였다. 그러면서 아우랑제브 때에 악바르의 지배체제가 무너져 자민다르 계급을 누를 길이 없어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고 또 마라타·라지푸트시크 교도 등의 모든 세력이 반항하였다. 특히 데칸에서는 오랫동안 황제 스스로 진압을 했으나 결국 안정할 수 없을 정도여서 황제가 죽은 후에는 무굴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그리고 18세기가 되면서 전술한 모든 세력이 확대하였을 분만 아니라 무굴제국의 세력 내에 있던 모든 지방에 ㅁ든 세력이 독립해서 분립하어나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대는 델리에 도읍을 둔 전술한 정권이 인도의 패권을 장악하고 모든 지방의 왕국은 그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그들 왕국은 각각 그 지방에서 독자적인 지배를 하고 그 문화를 조장하였으므로 결코 무시될 수 없었다. 이들 중에서 17~18세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라타 왕국이다. 17세기 중여무렵 시바지는 푸나에 가까운 서고츠 산맥의 성에 의해서 데칸이나 델리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라타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무굴제국과 싸웠으나 18세기에 이르자 푸나의 페슈와 밑에서 북인도의 각지에 진출하여 델리까지도 습격해서 당시 최대의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761년에 파니파트의 싸
움에서 패하여 진출이 막히고 제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점차 왕국의 실력은 쇠퇴되어 갔다. 이와 같이 인도가 분립된 상태일 때 영국의 식민지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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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27
  • 저작시기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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