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임나일본부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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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목 : 임나일본부의 비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1. 한국사에서 임나일본부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

Ⅱ. 본문
1. 임나일본부설이란
(1) `임나일본부`의 어의
(2) 어의의 분석
2.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여러 학설들
(1) 출선기관설
(2) 가야(가야)의 왜설
(3) 분국설
(4) 백제군사령부설
(5) 외교사절설

Ⅲ. 맺음말
1. 학문적 이론들의 문제점
2. 앞으로의 과제(조사자의 의견)

본문내용

를 위한 것이 아니라, 외교에 그 목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내용은 '일본부'의 실체가 '왜의 사신'이었다는 분석과도 잘 합치된다.
(2) '일본부'들은 언제나 가야 제국의 왕들과 공동의 보조를 취하고 있으며, 왜왕이나 백제왕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대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일본부;들의 외교활동은 다음과 같은 시기적 특징을 보인다. 전기에는 친백제 반신라적 외교를 전개하다가, 후기에는 친신라 반백제적 외교로 전환하고 있다. 이러한 시기적 변화는 '일본부'들의 활동이 왜나 백제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제국의 이해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532년을 전후로 금관국을 비롯한 동부의 가야 제국이 신라에 통합되면서 안라국과 대가야와 같은 남부와 서북부 가야제국은 백제와의 외교를 통하여 동부 가야 제국의 부흥을 꾀하는 한편, 자국들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이를 기회로 남부가야에 '군령성주'를 설치하는 등 가야에 대한 간섭을 노골화하였다. 이에 대해 가야제국은 다시 신라와의 외교를 통하여 백제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취하게 된다. 가야제국은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친백제 반신라 정책에서 반백제 친신라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변환은 '일본부'들의 외교 활동에서 보이는 특징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일본부'들의 행동이 왜나 백제가 아닌 가야 제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 시기의 '일본부'들은 파견시와는 다르게 파견 주체였던 왜왕과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백제의 성왕은 왜왕에게 반백제 친신라정책을 추진하는 카와치노아타히 등을 본거지로 송환시킬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이에 대해 왜왕은 아무런 실력행사도 못하고 있다. '일본부'들이 이미 왜왕의 통제와는 무관한 위치에 있게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시기에 있어서 왜왕은 몇 차례에 걸쳐 가야의 일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그 입장의 표명이 '일본부'들에게 직접 전달되지 못하였으며, 백제나 신라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왜왕은 '일본부'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관계도 아주 소원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4) 그렇다면 왜에서 임나와 안라에 각각 파견되어진 키비노오미, 카와치노아타히 등이 어째서 왜와에서 떨어져 가야 제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까? 이들의 출신문제와 왜의 사신으로서 이례적이었던 장기체류를 그 이유로 생각할 수 있다. 『일본서기』의 흠명기와 현종기 3년(487)조의 기사를 조합하여 보면, 카와치노아타히는 원래 가야에서 일본열도의 카와치지역에 이주했던 가야계 씨족의 일원임이 분명하고, 키비노오미도 가야계 씨족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결국 가야에서 일본의 카와치나 키비에 이주했던 이들은 '대화정권'이 카와치와 키비 지역을 통합한 후, 이들이 가야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다는 장점을 살려 다시 가야 지역으로 파견되어졌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다른 왜의 사신들과는 달리 가야지역에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서 체류하였다. 이들의 출신요소와 장기체루의 요인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왕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가야 제국왕과의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5) 이와 같은 관계는 흠명 5년(544) 3월조에 보이는 백제 성왕의 이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에서도 확인된다. 성왕은 "지금 이쿠하노오미, 키비노오미, 카와치노아타히 등은 가야인인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의 지시에 따르기만 할 뿐으로,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는 '일본부'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가 서부가야왕의 후예인 것은 『일본서기』의 흠명 5년조와 현종 3년조에서 확인되며, 당시 이들은 안라국에 체류하고 있었으므로 안라국왕의 통제에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부'들은 왜왕이나 백제왕이 아닌 가야의 왕에 의하여 조종되어지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6) 이와 같이 가야제국은 '일본부'들을 자기측에 붙여둠으로써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왜의 세력이 가야제국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보여 신라와 백제와의 외교교섭을 보다 더 유리하게 전개시켜 가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신라와 백제의 가야 지역에 대한 침략을 방어하면서 자국의 독립유지에 이들을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맺음말
이상과 같이 '임나일본부'에 관한 한일고대사학계의 연구동향에 대한 정리 및 비판과 함께 그 실체규명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간략하게 피력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면 다음과 같다.
(1) 종래 한일학계의 연구에서 왜나 백제를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은 가야 제국의 자체적 발전론이나 이해관계를 전혀 도외시하였던 시각이었으며,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었다기보다는 '일본학계의 막연한 선입관과 한국학계의 감정적 반발'의 산물이었다.
(2) '임나일본부'와 '안라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은 아니었으며, 임나와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키비노오미와 카와치노아타히가 그 실체였다.
(3) '일본부'들의 활동이란 가야제국의 왕들과 공동의 보조를 취하여 백제 또는 신라와의 외교교섭에 참가하였던 것이 전부였다.
(4) 백제는 동쪽 신라방어선의 안정이라는 목적을, 왜는 선진문물 수입의 창구유지라는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가야지역에 관여하였고, 그를 위해 '일본부'들을 이용하려 하였으나, '일본부'들은 서부 가야왕의 후예이며 가야 사람인 아현이나사와 좌로마도의 통제에 따르고 있었다.
(5) '일본부'들의 외교활동 내용이나 그 주장들을 보면, 동부의 신라와 서부의 백제의 침략에 대해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가야제국의 이해관계와 일치되는 것들 뿐이었다.
(6) 가야제국의 왕들은 자국의 독립유지를 위하여 백제 신라 왜를 대상으로 하는 외교교섭의 전면에 '일본부'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왜와의 관계를 원활히 함과 동시에, 백제와 신라에 대해 왜의 세력이 가야의 배후에 있는 것처럼 보여 백제와 신라의 침략을 외교적으로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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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0.31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9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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