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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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선사시대

2)춘추전국시대

3)진.한 전제국가 시대

4)한말 혼란기와 5호 16국 시대

5)수.당 시대

6)송나라

7)이민족의 왕조 원나라

8)명나라

9)세번째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

본문내용

지면서 중국의 문화가 서방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 수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상인 및 시민계급의 지위가 향상됐다. 납세제도에서도 당제(唐制)를 본받아 지세·정세·상세 등을 정했으나 재무행정의 실무를 주로 서역인과 한인에게 맡겼던 까닭으로 기강이 문란해짐에 따라서 부정부폐가 심하게 되었다. 결국 몽골족은 힘(力)으로는 한족을 지배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한족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고립의 길을 걸음으로써 한족이 세운 명에게 멸망하게 됐다.
8)명나라
명(明)은 원(元)대의 이민족 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했다. 이러한 개혁들을 통해 명조는 중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명 태조는 전지측량과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이갑제(里甲制)를 실시하는 등 농업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3대 성조 이후 기강이 문란해지고 관료의 당쟁과 환관의 전횡이 심했다. 15세기에는 서몽고의 오이라트가 침입했고, 토목(土木)의 변(變)에 이어 타타르의 침입으로 국세가 심히 위축됐다. 1644년 만주를 근거지로 한 만주족(옛 이름은 여진족) 왕조인 청(淸)이 쳐들어와 중국을 점령함으로써 명(明)나라는 멸망했다. 왕조의 잔여 세력이 장강(長江 : 양자강) 이남에서 전후로 복(福), 당(唐), 노(魯), 계(桂) 등의 왕조를 세웠는데 이를 남명(南明)이라고도 한다.
명조의 관제를 보면 중앙은 원(元)제국의 정치체제를 모방하여 중서성(中書省)과 6부를 설치했으며, 지방제도는 전국을 15성에 구분하여 각성에 재정기관인 승선포정사(承宣布政司)와 사법기관인 제형안찰사(提刑按察司)를 설치하여 각각 소관업무를 맡도록하고 때에 따라서 임시로 총독 혹은 순무(巡撫)를 파견하여 군사와 민정을 독려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각성을 다시 부(府)·주(州)·현(縣)의 순위를 구분하고 지부·지부·지현을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관리토록 했다.
학문적으로는 왕수인(王守仁)이 제창한 양명학(陽明學)이 많은 지지를 받았다. 원대의 문학은 희곡(戱 )이 발달한 반면 명대에는 소설(小說)이나 문학비평(文學批評)이 사회 전반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황관의 횡포와 함께 명조(明朝)의 몰락에 박차를 가한 것은 당파의 분쟁이었다. 처음에는 환관에 대항하여 설립됐으나 당쟁이 심해짐에 따라 타 당을 음해하는데 많은 국력을 낭비하여 만주족(滿洲族)의 중국 지배를 허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주족은 국호를 청(淸)이라 명하고 1644년에 중국을 점령하므로써 중국은 다시 한번 비한족의 통치를 받게 됐다. 청의 만주족은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한족을 강압, 자기네 풍속인 변발 등을 강요하는 등 한족과의 사에에 불화가 계속됐으나 성조(聖祖: 康熙帝), 세종(世宗: 雍正帝), 고종(高宗: 건룡제)으로 이어지는 1660∼1800년의 130여년간, 훌륭한 통치를 보여 당시 중국에 있었던 예수교 선교사에 의해 그 내용이 유럽에도 소개됐고 이 때에 정비된 관료제도가 프랑스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조의 힘이 조기에 쇠진한데다 해외 중상주의(重商主義) 국가들의 끊임없는 통상압력을 받아 청조의 운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19세기 아편전쟁(1839∼1842)·태평천국운동(1851∼1864)·청일전쟁(1894∼1895)에 이르기까지 청조는 외세의 침략을 그대로 방치하여 점점 더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결국 1911년 손문(孫文) 일파의 혁명당에 의해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고 청나라는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졌다.
9)세번째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
중국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통치하게 된 청(淸)제국은 초기에는 명말(明末)의 혼란한 사회상이 여전히 지속됐지만, 강희제(康熙帝)가 즉위한 후 통일제국으로서의 긴반을 확고히 다지고 혼란한 사회를 정비하는데 성공했다. 관제는 명조(明朝)의 그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내각과 8부를 설치했으며 정부의 여러 관직에 원(元)대와는 달리 만주인뿐만 아니라 한인(漢人)도 등용하는 비교적 관대한 인사정책을 실시했다. 외교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개방압력에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중국이 마침내 '양이(洋夷)'에게 굴복하고 반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학문적으로는 경서(經書)의 문헌학적인 비판을 통하여 사실의 진위(眞僞)를 밝히는 시에 문자의 시대적인 의미를 증명함으로써 경서 본래의 원의(原義)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널리 발전했다. 이러한 고증학의 영향은 다른 분야에도 파급되어 역사학·금석학·감학(校勘學) 등의 고증적 방법에 의한 연구를 구하게 됐다.
19세기 중반 두차례에 걸친 영국과의 전쟁(1840년 아편전쟁, 1856년 애로우호사건)으로 서양강국의 굴욕적인 문호개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청조(淸朝)는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이나 자강운동(自强運動)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내부의 권력투쟁과 이념의 변질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와중에 1884년 청불전쟁(淸佛戰爭),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의 패배는 청나라의 종주권을 빼앗아가는 계기가 됐다. 이 후에도 청조(淸朝)는 꺼져가는 왕조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많은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이나 입헌운동(立憲運動) 등의 개혁운동을 추진했지만 서양열강의 압력과 청조(淸朝)의 독선적인 방법으로 말미암아 개혁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1911년 민영철도를 국유화하여 제국주의 열강에게 매각하려는 청정(淸廷)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일어났던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불씨는 무창(武昌)에서 혁명파가 청군을 대파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 손문(孫文)은 혁명정부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의 임시대통령(臨時大統領)에 취임하고 이 해를 민국 원년으로 하였으며, 수도를 남경(南京)에 두었다. 그해 2월 손문은 황제 퇴위와 내각책임제 실시, 남경에서의 취임 등을 조건으로 청정부의 내각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으며,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가 원세개의 강압에 의해 퇴위하게 됨에 따라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조(淸朝)는 268년만에 멸망하고 중국 최초의 공화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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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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