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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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중상주의(mercantilism)의 기원

2. 중상주의의 배경

3. 중상주의의 의의

4. 중상주의(重商主義)의 내용
1) 중금주의정책(重金主義政策)
2) 무역차액정책(貿易借額政策)
3) 산업보호정책(産業保護政策)

5. 영국의 중상주의 사상
1) 영국의 대외팽창(16세기 - 18세기)
2) 중상주의 정책의 변모

본문내용

는 페르시아와 봄베이에 진출하였다. 영국은 1629년 북아메리카의 퀘백, 1655년 자메이카를 차지하였고, 1663년에는 1626년 네덜란드가 세운 뉴암스테르담을 구입하여 이듬해 뉴욕으로 개칭하였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한 이후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구축하였다. 이 사이에 영국의 무역은 무려 10배 증가하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상업과 Manufacture가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고있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영국을 유럽의 중심적 산업 및 상업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항해조례(航海條例)였다. 크롬웰은 항해조례를 선포하여 유럽의 수출품은 오직 영국선박이나 그 상품의 원산국가의 선박만으로 운송될 수 있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의 생산물은 오직 영국 및 그 식민지의 선박으로만 수입될 수 있도록 하였다. 1660년의 항해조례는 이를 더욱 강화하여 선장과 승무원의 2/3 가 반드시 영국인이 되도록 규정하였다. 항해조례가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이후에도 계속 효력을 유지한 이유는 정부의 대외정책이 무역상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1651년 제 1차 항해조례 이후 네덜란드와의 제1차 전쟁[1652 - 1654]는 크롬웰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역상인들을 위해 수행된 것이다. 1654년에 시작된 스페인과의 전쟁은 반대로 상인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즉 청교도 혁명 이후 영국 정부와 무역은 사실상 상인들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상인들의 정부의 외교정책에 대한 영향력은 이미 절대 왕정기에도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군주는 이미 국가의 주요 시책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특히, 각 무역회사가 각자의 특권에만 집착하던 시대가 지나간 청교도 혁명 이후에는 국가의 정책이 영국 무역 전체의 이익이란 입장에서 실시되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번영을 억제하기 위해서 고안된 항해조례는 이제 영국의 식민지 확장을 위한 도구로 전환되어 가게 되었다. 항해조례는 기본적으로 담배·설탕·솜·물감 등의 식민지 상품을 독점함과 동시에 식민지를 본국 상품의 시장으로 만들며, 식민지 확장을 도모 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이후 영국이 외교정책 및 무역정책의 기본노선이 되었다. 항해조례가 영국 경제사상 하나의 전환점으로 인증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항해 조례가 상인 특히 무역상인의 이해를 대표한 것 이였다 하더라도 국내의 생산력 및 생산자의 이해와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을 수 없음은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그 결과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제2차[1665 - 1667] 제3차 전쟁[1672 - 1674]와 18세기 프랑스와의 전쟁을 거친 뒤 인도 아메리카대륙 인도 등지의 여러 곳에 무역기지와 식민지를 확장해갔다.
영국은 18세기에 들어서는 스페인계승전쟁을 필두로, 특히 프랑스와의 통상 전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는데 , 이것은 모두 스페인령 신대륙과 막대한 금을 생산하는 포르투갈령 브라질에서의 상업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영국은 거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는데, 이 때마다 유리한 통상조약을 맺고 식민지에서의 상권을 확립하였다. 그 결과 영국의 런던은 18세기 후반에 암스테르담을 능가하여 세계금융의 중심주로 부상하였다. 즉 국내의 산업생산력을 기반으로 무역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영국은 유럽에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2) 중상주의 정책의 변모
영국은 식민지의 개척이나 공업의 발전에 있어서 뒤늦게 시작한 나라였다. 16세기초만 하더라도 영국은 상공업이 발달되지 않아서 수출상품은 주로 원료였으므로 공산품을 수입하였으며 무역도 주로 외국인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유한 상인들도 존재 할 수 없었고 화폐자본은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정부는 무역을 재정 정책적인 관점에서 다루게 되었으며, 수출입관세가 부과되었고, 모든 해외거래가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여기에서 정부의 통제란 관세를 받는 일과 화폐가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금·은의 유출이 금지되고 있었으므로 외국상인이 영국에서 상품을 판매하면 반드시 그 대금을 영국에서 생산된 다른 상품을 구입하는데 지출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국의 무역업자가 상품을 수출하였을 때는 그 일부는 금·은만 수입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초기 중상주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관세와 귀금속에 대한 재정정책이었다. 이처럼 화폐자체를 부라고 봄으로서 어떠한 명목으로도 금·은의 유출을 허용하지 않았던 정책을 중금주의라고 한다.
상공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중금주의와 같은 재정정책은 해외무역을 어렵게 하였으므로 무역차액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6세기 후반 영국의 국내경제는 전환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양모가 수출의 주종상품이었으나 이제는 의류로 바뀌어지고 해외무역이 발전하면서 상인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해운업과 공업도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상업에 비해서 산업자본의 역할은 미비한 상태였고 아직 구매자자본으로서의 원시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상인들이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공업은 수출과 직접 관련을 갖게 되었으며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것이 봉건주의체제를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정부 역시 해운업 및 수출산업을 육성하여 세계시장에서의 영국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면에서 후기중상주의 정책은 보호무역주의적인 경제정책이었으며 관세를 이용하여 공업을 육성하고, 상공업국가로 전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국의 중상주의정책은 시장기능 전반에 걸친 정부의 개입과 간섭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국제무역과 관련된 분야에 대한 개입은 더욱 심했으며 중상주의 정책이 의도했던, 일반적으로 대규모 무역회사에게 높은 이윤을 보장해주고 국민정부의 재정을 확대시키는 것,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자국으로 최대한 귀금속을 유입시키고 국내시장확보와 외국시장의 확충을 통한 산업자본축적과 수출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국제무역수지를 개선하는 것이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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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0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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