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오끼나와이야기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인문] 오끼나와이야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오끼나와의 언어, 위치, 기후
2. 시기별로 본 오끼나와(유구)
3. 유구의 대외관계
4. 일본의 유구 복속

Ⅲ. <결론>

본문내용

심화되는 것은 근대 국가에서 군민교육을 철저히 실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 일본의 유구 복속
1>일본의 유구복속
일본측 사료에 유구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남도 아아나파'란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일본서기』이며 시기로는 616년이다. 이후 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남도'의 사람들이 일본에 조공을 행하여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단편적이고 일방적인 기록에 불과하다. 일본과 유구간에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교섭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무로마치시대에 와서였다.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은 1414년 12월에 쇼군아시카가 이에모치가 유구왕 상사소에게 보내는 답서이다. 그 내용은 유구왕의 서한과 진상물을 확실히 수령했다는 것이었다. 1480년 2월 막부가 시마즈씨를 통해 유구의 조공을 재촉하고 있는 서한에도 유구의 조공선을 이전처럼 파견하라는 구절이 보인다.
무로마치막부와 유구와의 관계는 유구가 공물을 현상하는 형태를 취했으므로 일종의 조공관계였다. 그러나 양국 간엔 조공무역보다 유구가 남해산의 향료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무역품을 일본의 사카이에 가져와 행하는 사무역관계가 주로 행하여 졌다.
1588년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마즈씨를 통해 유구의 복속을 요구해 왔다. 이에 답하여 유구가 히데요시에게 축하의 사절을 파견하는 것은 그 다음해이다.
유구사절을 접견한 히데요시는 유구를 복속국으로 간주하고 조선침략에 즈음해서는 유구에게도 부담을 지우게 된다. 즉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군 7천명의 10개월치 군량 징납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유구가 히데요시의 복속 정책에 그저 굴복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중국침략 계획을 신속히 명에 전달하여 일본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기도 한다.
2>미군의 오키나와 지배
미국이 오끼나와를 일본에서 분리하여 지배하려 한 의도는 미-일 안보조약에 근거한 기지와는 다른 역할을 오끼나와 기지에 부담시키는 데 있었다. 그 다른 역할이란 다음의 두가지였다.
하나는 오끼나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지로서 확보해 두고자 한 점이다. 미-일 안보조약에는 일본이 미국에 부탁하여 기지를 두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령 미군이 핵무기를 들여오거나 공격 기지로 자유롭게 사용하려 할 경우 일본 국민들의 큰 반발에 봉착 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때 정부가 조약을 방패삼아 국민의 불만을 누르려고 하면 일본 정부의 입장만 위태롭게 될 것이다. 즉 주권국가와 맺은 조약은 그 조문에 '특권적 지위를 보장한다'는 규정이 있다 해도 그 나름대로 제약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키나와와 같이 미군이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경우 그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유롭게 기지를 세울 수 있다는 점이다. 미-일 안보조약에 따라 일본 정부는 미군에게 기지 제공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제공된 기지의 토지소유자가 이에 반발할 경우 이들 토지를 강제적으로 수용하거나 사용하기에 앞서 그에 따른 법적 절차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미군에게 토지를 제공하기 위해 특별 토지수용법인 「미군용지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이 지배권을 장악한 오키나와에서는 이러한 법적 절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미군이 발하는 포령, 포고라 불리는 명령이 법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끼나와에서는 문자 그대로 '총칼과 불도저'를 앞세운 토지강탈이 강행되었다. 만약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건설되지 않았을 것이다.
3>일본이 된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부터 일본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무엇이 변하였는가? 군정 아래 무권리 상태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정부의 경우는 오키나와 반환을 이용하여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 전 지역의 군사기지를 정리 및 통합하고자 하였다.
오키나와 반환이 결정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본토의 미군기지는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일본에 오키나와가 반환되었다고 하지만 미군 범죄나 미군 기지와 관련된 사건 및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그때마다 현 의회와 시, 정, 촌 의회는 항의 결의를 반복하고 시민단체들도 항의운동을 전개하였다. 복귀 후 25년 동안 미군이 저지른 사건 및 사고에 대해 현 의회가 결의한 항의만 해도 실로 125번에 달한다. 그런 항의행동의 밑바닥에서 반전, 반기지 투쟁의 불씨를 지켜온 사람들은 바로 '반전 지주'들이었다.
) 아라사끼 모리테루 「또 하나의 일본, 오키나와 이야기」(역사 비평사,1998)109면
●결론<일본의 율도국 오키나와>
유구, 오키나와 이 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럼 유구왕국과 오키나와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분명 그 차이는 확연하다. 일본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다른 생활권에 속해 있는 느낌을 주는 오키나와.
오키나와는 유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독립된 왕국으로서 중국의 속국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조선 왕조처럼 중국의 황실과는 신하의 나라로 관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본보다도 차라리 중국의 왕실과 더욱 친분을 가졌으며 그들 오키나와도 메이지 정부 이전까지는 하나의 독립 왕국으로 한국, 중국, 일본과 중계무역을 통한 한나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대가를 치르게 된 오키나와. 그로 인해 27년 간의 미군 지배체제와 1972년 이후에도 오키나와가 반환될 때 다시 체결한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의거하여 아직도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으로 남은 오키나와의 비극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 국이 오키나와가 아니였을까하는 말이 있듯이 한국에 있어서도 아니 한국, 중국, 일본, 미국 그 외 수많은 나라들의 목표 대상 이였던 오키나와. 과연 오키나와는 정말 일본의 오키나와인가 아니면 유구왕국인가란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참고 문헌》
아라사끼 모리테루, 「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 이야기」역사 비평사, 1998
하우봉 외, 「조선과 유구」 아르케, 1999
휴맨 카인즈, 「오끼나와」이상사, 1973
《참고 사이트》
www.goodnews.co.kr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3.11.11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224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