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18세기초-19세기) 화단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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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18세기초-19세기) 화단에 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Ⅱ. 조선후기 화단의 흐름(18세기초-19세기)

Ⅲ. 조선후기 화단의 대표작가와 작품세계
ⅰ. 담졸(淡拙) 강희언(姜熙彦)
ⅱ.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Ⅳ. 조선후기 화단의 미술사적 의의

Ⅴ. 결론

Ⅵ. 참고 문헌

본문내용

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서양의 문물이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 명에 다녀온 사신에 의해서이지만 그 후 인조조(1623-1649)를 전후해서부터는 점차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는 청조와의 교섭을 통하여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교의 선교사들이나 그들의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에선 실학이 대두되고 더구나 북학파(北學派)의 주요인물들은 연행을 하여 직접 청조의 문물과 또 그곳에 전해진 서양의 문물과도 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가 포교됨에 따라 자연히 서양의 문화가 동점(東漸)하게 되었다. 당시 청조의 궁정에는 이탈리아의 신부 낭세녕(廊世寧, 1688-1766, 본명은 카스틸리오네)을 비롯한 서양의 신부들이 미술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영행은 일부의 중국화가들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낭세녕의 화풍은 전통적인 중국의 화법에다 서양화의 화법을 혼합한 절충적인 것이었다. 청조에 들어와 있던 이러한 서양화풍이 조선 후기의 어느 때엔가 전래되어 강세황, 김두량, 김덕성, 이희영 등 일부의 소수 화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후기 화가들은 한 가지 이상의 화풍을 구사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는 자아를 발견하고, 또는 생활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한국적 미술을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 상게서, p. 148.
Ⅴ.결론
진경산수나 풍속화, 여타의 회화 영역에서 큰 성장을 보인 영조와 정조년간은 전후반기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약간 다른 발전과정을 보여준다. 전반부는 숙종(재위 1674-1720)말기에서 영조(재위1724-76)년까지, 후반부는 영조 말 정조(재위1776-1800)년간에서 영·정조 문화의 여파가 어느 정도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순조(재위 1800-34)년간 초기 1810년대까지이다.
전반기는 정선의 출현과 함께 이루어진 진경산수화의 정립과 유행이 대변한다. 그리고 선비 화가인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영석 등이 중기의 전통화풍을 따르면서도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로 등장하였고,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표암 강세황 등 윤두서나 조영석보다 한 세대 정도 후배 화가들 사이에서는 중국 원·명체의 남종문인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남종화풍이 조선적 감성으로 정착되는데는 정선에 공감하여 활발해진 기행사경이 작용하였다. 한편 사대부 그림과 화원 그림을 구분하기 위해 설정된 남종화 이념의 수용은 조선 후기 선비화가들 사이에 문예의 계급인식을 일깨운 반면, 보수성으로 기울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18세기 전반부 회화는 정조년까지 장수한 작가들에 의해서 후반부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에서도 다리 역할을 한 인물이 강세황이다. 강세황의 화론적 뒷받침에 힙입어 대성한 작가가 바로 김홍도이다. 18세기는 전후반의 미의식과 예술 성향에 차이가 난다. 전반기에는 새로운 시작의 부상으로 다양성이 파급되었는데, 그 가운데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단연 우뚝하였다. 후반기에는 전반기의 다양한 회화를 고루 섭렵하며 질적 발전을 이룩한 김홍도에 의해 주도되면서 현실감을 반영한 풍속화가 자리를 잡았다.
상게서, pp. 27-29.
18세기 초·중엽의 풍속화는 윤두서·조영석에서 오명현·강세황 등 선비화가로, 또 김두량·강희언 등 전문적 화원이나 중인층 화가로 확산되면서 뿌리를 내렸다. 이들은 민중 삶과 자기 주변에서의 일상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당시에는 '속된 그림'으로 치부당하면서도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당당한 회화영역으로 이끌어 올렸다. 그런데 이들 풍속화는 묘사기량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였고, 동일 작가의 산수인물이나 다른 주제에 비하여 회화적 형식미의 손실이 뒤따르기도 했다. 반면에 대상의 감정표현에 충실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현실 소재에 대한 자신의 화의(畵意)를 개성적 어법으로 담기 위해 현장사생에 관심을 쏟은 창작대도와 대상에 대한 치밀한 탐구로써 기존에 익숙해 있던 중국적이고 낡은 필묵법에서 탈피한 점은 소중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문인화가들의 진경작품은 여기적(餘技的) 시취를 담은 아마추어적인 필치를 보여주지만, 대상 포착과 화면구성에서 남종화적 해석으로 한국의 자연에 부합하는 새롭고 독자적인 화격을 이룩해낸 것이다. 그러한 경향은 이인상·이윤영등 1740-1750년대의 화풍에서 1780-90년대의 강세황·정수영의 사경도에 이르러 더욱 뚜렷해졌다. 특히 강세황이나 정수영의 시·서·화를 포함한 <사경도권첩>은 기행하는 가운데 절경에서 받은 감흥을 현장 약사(略寫)의 파격적인 필치를 유감없이 살려내어 18세기 문인화가의 진경산수화, 즉 기행사경의 양식적 정형을 이룩한 것이다.
초상화에 있어서는 문인화가의 초상화의 이에 자극을 받은 화원 화가들의 양식화된 초상제작에서 벗어난 일반 사대부들의 초상이다. 즉 윤두서나 강세황의 자화상 등 문인화가가 남긴 초상화는 많지 않지만 참신한 화풍을 이루었고, 이러한 화풍이 당시 도화서 화가들을 자극했음은 조선 후기의 회화 조류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상게서, p. 133, p. 201, p. 320.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후기회화는 진경산수화의 발전과 유행, 남종화법의 유행, 풍속화의 유행 등으로 요약 할 수 있다.
Ⅵ . 참고 문헌.
한국 회화사, 안휘준, 2000년, 일지사.
한국 현대 미술사, 오광수, 2000년, 열화당.
한국 미술사 101장면, 임두빈, 1999년, 가람기획.
조선 후기 회화의 사실정신, 이태호, 1996년, 학고재.
우리 옛그림의 아름다움, 이동주, 1996년, 시공사.
조선 미술사, 조인규외, 1993년, 학민사.
조선시대 그림속의 서양화법, 이성미, 2000년, 대원사.
이야기 하는 그림, 이규일, 1999년, 시공사.
한국 미술 문화의 이해, 김원용외, 1994년, 예경.
동양화 산책, 허유, 2000년, 다빈치.
한국회화의 전통, 안휘준, 1988년, 문예출판사.
조선시대회화사론, 홍미표, 1999년, 문예출판사.
한국회화, 국립중앙박물관, 1977년, 통천문화사.
한국의 미술과 문화, 안휘준, 2000년,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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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1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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