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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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민주주의의 절대적 형태는 수용이 어려웠으리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유신이후 권력집중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점점 더 강조되게 되었고 점차 집권의 정당화와 영속화를 위한 도구적 이념으로 변화되게 되었다
결론...
왜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를 잊지 못하고 있는지? 아직 우리나라에서 이 같은 의미는 경제적 위기가 닥쳐오고 집권하는 당이 무능력 할 때 박정희라는 인물이 다시 거론되어 지고 있다. 박정희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알 수 있으며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했던 시기에 해당되고 그 과정에서 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 중 억척스럽게 산업화를 통한 사회 구조의 변화는 심대했고 독재와 민주의 갈등은 격렬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동시에 혹독한 장기 독재를 꾀했다. 그렇다면 그는 경제성장과 독재의 편에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 요즘 이 시대에 이와 비슷한 것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그가 경제성장과 독재의 사이에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지금 정권을 획득한 사람들은 말한다. 경제성장과 물가안정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고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만약 그가 경제 성장을 하기 위해 독재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장기독재는 있을 수 없음 뿐 아니라 그 시대의 영웅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의 경제권을 세계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볼 때도 그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형 박상희가 항일 운동에 투신했음에도 그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만주로 갔다. 학병으로 끌려갔던 장준하가 일군을 탈출 광복군에 참여했음에 비해 그는 일제 사관학교와 만주군에서 성공하길 바랐다. 또한 그는 자신이 남로당에 관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밀사이자 형의 친구인 황태성을 가차없이 처형했다. 쿠데타의 집념 뒤에는 동료들도 거리낌없이 배신하는 냉혹함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애증의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신드롬은 경제동물로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이 경제동물임을 인정하면서 계속 경제동물로 살겠다면 그게 문제될 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인들은 그걸 인정하지도 않을뿐더러 입으로는 아주 고상한 것들도 추구한다. 박정희 신드롬이 일면서도 민주정권들을 민주화와 인권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다중인격성은 상당 부분 현대사에 대한 무지 또는 왜곡된 인식에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70년대 한국인에게는 박정희가 삶의 일부였다. 79년 10월26일 울린 총탄에 그가 스러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느낀 것은 충격이자 상실감이었다. 지금까지도 일부 박정희 예찬론자뿐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에게 군사독재 멘탈리티가 남아 있다고 본다. 이는 자유를 한껏 누리고 그걸 양보할 뜻이 전혀 없으면서도 권위주의적 체제가 제공했던 질서정연한 통제와 강력한 리더십을 동경하는 이중의 정신상태를 뜻한다. 이런 이중성은 자기들이 이룬 성장을 뻐기는 졸부 근성이면서 피땀 어린 노력에 대해선 지나치게 겸허한 자만과 자학의 모순이다. 박정권 치하에서 탄압받던 민주화 투사들이 정작 집권하자 박정희 신드롬이 열병처럼 번진 것도 이 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한다. 어쩌면 우리는 김대중식 민주주의는 원 없이 누리면서 박정희식 리더십을 바라는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된 책임은 민주화 투사 출신으로 집권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도 있다. 그들이 받은 탄압은 과대포장되어 왔다. 비극은 그들이 그러한 과대포장을 즐겼으며 또 스스로 과대포장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박정희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기로부터 해방 이후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가 걸었던 길은 그리 자랑스러운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적극적인 친일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일제의 권력에 편승하여 입신하고자 했던 처신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위해 항상 정치판을 뒤집어엎고자 했던 집념어린 쿠데타의 꿈 그리고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가차없이 억눌러 버렸던 민주주의 이런 것들이 좌절을 딛고 성공한 집념의 인간상으로 또한 경제성장의 영웅으로 조명되는 그에게서 뗄래야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면인 것이다. 우리 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적 모순과 부패구조를 만들어 냈던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해서 또 미화될 수는 없다. 경제적 성과를 간과하고 정치적 과오들만 비난해 정권 자체를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듯이 정치적 과오를 간과하고 경제적 성과만으로 정권을 평가하는 것 또한 한계가 있다. 산업화 정책은 정당성의 결핍에 따른 정책이었고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국민생활 향상에 기여는 했지만 그것의 동기는 정당성의 빈곤을 보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역사에 흔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없다. 그러나 시기상조라는 이유만으로 평가를 유보한다면 역사는 되풀이되고 말 것이다. 시기가 이를지라도 객관적 평가작업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날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교훈을 찾고 그것을 역사의 자양분으로 삼을 때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발전하게 될 것이다. 박정희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로가 다를 수 있으나 이제는 이를 부정하기보다는 이를 근본적인 개선 대안을 찾아 지금 우리가 강대국들에게 빠져 세상 속에서 힘없이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같은 박정희의 조금은 카리스마적이고 약간의 독재 아닌 독재를 겸비해 우리나라의 명실상부한 국가 건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지금 일본이나 미국의 농락에 우리나라는 이러저러한 대책 없이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동해가 일본 땅으로 들어가지 않느냐. 군사용 비행기도 어찌 보면 우리나라를 너무 가벼이 여기어 그런 것이 아닌지 그 당시 박정권 때 김재규에 의해 서거하지 않았더라면 핵이 개발했을지 누가 알 수 있으랴. 한 인물이 우리의 역사에 얼마나 큰 업을 남기고 갔는지 우리는 이런 현실을 감안해 볼 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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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3.11.19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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