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해부학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서 론
1. 서양의학의 도입
1) 에스파니아와 포르투갈 의학의 도입
2) 네덜란드(和蘭) 의학의 도입
2. 야마와키 토요와 인체해부
3. 해부학 서적의 번역
1) 『해체신서(解體新書)』의 번역
2) 『해체신서』 이후의 해부학 서적

[2] 결 론

본문내용

부터 많은 난학자가 배출되었다. 이 사람들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일본의 의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들 중의 하나인 이나무라 산파크(稻村三伯)는 뒤에 우나카미 주이오우(海上隧鷗)라 칭하고 쿄토에 이주하여 살았고, 오사카 사람인 하시모토 소우키치(橋本宗吉)는 에토에서 오츠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각각 쿄토와 오사카의 난학의 시조가 되었다. 이나무라는 일본에서 최초로 난화(蘭和)사전(에토하루마, 1796)을 펴낸 것으로 유명하다.
우타카와(宇田川) 가문의 사람들도 난학의 발달에 큰 공적을 남겼다. 우타카와 켄이(宇田川玄隧)는 한의학을 배운 뒤에 오츠키의 문하에 들어가 고르테르(Johannes de Gorter, 1689-1762)의 내과서를 번역하여 『서설내과찬요(西說內科撰要)』라는 18권의 책을 펴내었다. 이것은 서양의 내과서로는 일본에 처음 소개된 것이었다.
) 大龍紀雄. 解體新書の西說內科撰要に及ぼした影響. 日本醫史學雜誌 1974;20:200
켄이의 양자 우타카와 켄진(宇田川玄眞)의 저서 『의범제강(醫範提綱)』 3권은 1805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간결한 문장으로 서양해부학의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였고, 사람의 생리와 병리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해체신서』보다는 이 책이 당시에 더 많이 읽혔던 것 같다. 이 책에 실려있는 52개의 해부도는 일본 최초의 동판해부도로 1808년에 나왔다. 이 동판의 제작자는 아오우도우 덴첸(亞歐堂田善)이었다. 동판해부도의 제작에는 오사카의 나카이 사부로우(中伊三郞)도 공적을 남겼다. 『중정해체신서』에 실린 해부도는 바로 그가 제작한 것이었다. 그는 또 따로 『해부도보(解剖圖譜)』 상하편을 1822년에 출판하였다. 나카이는 오사카의 난학자로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오그라들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동판제작의 기술을 익혀 동판해부도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책들 외에도 19세기 중반에 와서는 보다 다양한 서양의 해부학 서적들이 소개되고 번역되었다.
) 阿知波五郞. 幕末明治初期(1840-1887)解剖學書目錄について. 日本醫史學雜誌 1976;22:215
오사카와 쿄토의 난학은 에토보다는 늦게 일어났다. 난학이 처음에는 에토로부터 들어왔지만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이르러 자체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에토로부터 난학을 들여오는 데에 주된 역할을 한 사람은 코이시 켄슈우(小石元俊), 하시모토 소우키치(橋本宗吉) 등을 꼽을 수 있다. 코이시는 에토 유학 기간도 짧았고 네덜란드 어도 조금밖에는 알지 못했으나 난학을 진흥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는 특히 해부학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어 1783년에는 40세 남자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기록을 남겼으며, 1798년에는 미쿠모 칸젠(三雲環善), 야마와키 토카이(山脇東海)와 함께 34세 남자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기록을 남겼다.
한편 서양학문을 단순히 책을 읽음으로써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험을 통해 실증적으로 알고자 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신장의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 시행한 실험이 『화란의사문답(和蘭醫事問答)』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인체를 해부한 뒤 신동맥에 관을 넣고 먹물을 주입하였다. 그리고 잠깐동안 그 동맥을 막고 신장을 손으로 누르자 요관으로부터 걸러진 물이 나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처음 주입한 먹물은 피에 해당하고 요관을 통해 나온 걸러진 액체는 오줌으로 생각할 수 있어 신장은 피를 걸러 오줌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장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50) 杉田玄白. 和蘭醫事問答. 芳賀徹. 日本の名著 22. 東京: 中央公論社, 1984:185
중국에서 전래된 오장육부의 이론으로는 신장의 기능은 완전히 잘못 이해되고 있었으며 신장에서 오줌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서양의학이 전해질 때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1800년 오사카의 요시지마에서 37세 된 여자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할 때 그린 그림과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것을 보면 앞서 설명한 신장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에토의 난학자들은 서양어로 된 책을 읽고 이를 번역하는 데에는 뛰어났지만 실증적인 면에서는 오사카나 쿄토의 학자들에 미치지 못했다. 한편 당시에는 해부도뿐만 아니라 나무로 된 골격표본도 만들어져 사람 몸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 蒲原宏. 江戶時代に作制された木制人體骨格模型について. 日本醫史學雜誌 1971;17:1
결 론
우리나라와 일본은 흔히 말하듯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이다. 그 가까움과 멂은 단순히 지리상의 인접성이나 감정상의 거리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유하는 문화의 가까움과 아울러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멂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서양의 문물을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우리나라는 비슷한 시기에 쇄국을 함으로써 근대화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게 된 것이라고 흔히들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실의 절반만을 말해 주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눈에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의 극적인 모습으로만 비쳐진다. 사건들은 일련의 과정들의 정점에 위치하며 이를 단적인 모습으로 표현해 준다. 그렇지만 그 사건들의 뿌리는 훨씬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해부학의 도입 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일본이 서양학문을 받아들인 것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재적인 전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도 일찍이 사람에 대한 해부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친 반면, 일본에서는 그 결과들이 기록으로 남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인들에서 보여지는 실증성에 대한 이와 같은 선호는 과학기술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유학을 받아들이는 데서도 나타나 일본의 유학까지도 다른 나라의 유학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그들은 우리와 왜 그렇게 다른가? 우리는 아직 그 명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성급하게 그 이유들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그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를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색인 단어: 해부학 . 해부 . 일본 . 번역
  • 가격3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3.11.19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348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