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성 바르돌로뮤 축일 학살 사건(The Massacre of St. Bartholomew`s Day)
2. 영화 ` 여왕 마고 `
3. 앙리 4세와 낭트칙령
4. 프로테스탄트와 절대왕정
2. 영화 ` 여왕 마고 `
3. 앙리 4세와 낭트칙령
4. 프로테스탄트와 절대왕정
본문내용
스 혁명이 일어나고 루이16세가 마침내 종교의 자유를 반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희생은 대단했으나 개종한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결국 '광야 교회'는 생존한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 프랑스의 절대주의 하면, 루이 14세부터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프랑스는 이미 16세기초에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완료한 국가였다. 그러나, 그들은 16세기에 중반을 넘어서면서 또한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분열과 내부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이들은 카톨릭 왕조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투쟁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카톨릭 왕조에선 프로테스탄트들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은 역대 프랑스왕실의 종교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대 프랑스 왕실의 종교정책을 보면,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교회나 신앙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카톨릭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나 카톨릭 신앙이 옳아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 초기 프랑스를 통치했던 인물인 프란시스 1세 때부터 잘 나타난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들로 인해 프랑스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그의 적수였던 독일 황제 칼 5세를 괴롭히기 위해 독일 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국내의 프로테스탄트 정책에 있어서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할 땐 상당한 자유를 허가하는가하면, 다른 시기에는 다른 카톨릭 국가와 마찬가지로 가혹하게 탄압하곤 했다.
또한 '여왕 마고'에서도 나타나듯, 까뜨린느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자유를 인정하였다가 때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학살 사건을 일으킨다.
리셜리외 역시 자신이 카톨릭 교회 추기경-대주교-이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약화시키기 위해 30년 전쟁 중 프로테스탄트 측을 지원한다. 또한 국내의 프로테스탄트들도 그들의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 세력을 용납 못하여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탄생 이래로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다가(물론 자유가 주어질 때도 있었지만)앙리 4세 때만 자유를 누릴 뿐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1787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 자유를 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생존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특히 루이 14,15세 때에는 지도자나 이끌어주는 세력도 없이 비밀리에 예배를 하며 지켜나간다.(100여 년이 넘는다.) 죽음도 불사한 그들의 신앙은 힘으로 제어될 수 없는 것이었다. 1787년 종교의 자유는 자신들을 그토록 탄압한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끝에서 선포된 것이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참고 문헌>
다니엘 리비에르. 최갑수 옮김, 1995,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의 역사, 도서출판 까치
박무성, 1992, 西洋近代史總論, 법문사
유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1988, 은성
오연수, 2000, 종교개혁사, 도서출판 한글
패리 앤더슨 씀, 김현일 외 옮김, 1993, 절대주의 국가의 역사, 소나무
보통의 경우 프랑스의 절대주의 하면, 루이 14세부터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프랑스는 이미 16세기초에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완료한 국가였다. 그러나, 그들은 16세기에 중반을 넘어서면서 또한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분열과 내부적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이들은 카톨릭 왕조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투쟁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의 카톨릭 왕조에선 프로테스탄트들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것은 역대 프랑스왕실의 종교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대 프랑스 왕실의 종교정책을 보면,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교회나 신앙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인 것이었다. 즉 카톨릭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나 카톨릭 신앙이 옳아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 초기 프랑스를 통치했던 인물인 프란시스 1세 때부터 잘 나타난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들로 인해 프랑스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그의 적수였던 독일 황제 칼 5세를 괴롭히기 위해 독일 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국내의 프로테스탄트 정책에 있어서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할 땐 상당한 자유를 허가하는가하면, 다른 시기에는 다른 카톨릭 국가와 마찬가지로 가혹하게 탄압하곤 했다.
또한 '여왕 마고'에서도 나타나듯, 까뜨린느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자유를 인정하였다가 때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학살 사건을 일으킨다.
리셜리외 역시 자신이 카톨릭 교회 추기경-대주교-이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약화시키기 위해 30년 전쟁 중 프로테스탄트 측을 지원한다. 또한 국내의 프로테스탄트들도 그들의 신앙이 아니라 정치적 세력을 용납 못하여 탄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탄생 이래로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다가(물론 자유가 주어질 때도 있었지만)앙리 4세 때만 자유를 누릴 뿐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1787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 자유를 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생존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특히 루이 14,15세 때에는 지도자나 이끌어주는 세력도 없이 비밀리에 예배를 하며 지켜나간다.(100여 년이 넘는다.) 죽음도 불사한 그들의 신앙은 힘으로 제어될 수 없는 것이었다. 1787년 종교의 자유는 자신들을 그토록 탄압한 프랑스의 절대왕정의 끝에서 선포된 것이었기 때문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참고 문헌>
다니엘 리비에르. 최갑수 옮김, 1995,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의 역사, 도서출판 까치
박무성, 1992, 西洋近代史總論, 법문사
유스토 L. 곤잘레스, 종교개혁사, 1988, 은성
오연수, 2000, 종교개혁사, 도서출판 한글
패리 앤더슨 씀, 김현일 외 옮김, 1993, 절대주의 국가의 역사,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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