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문학-한글창제,국악,악장,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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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시대의 역사적인 배경

2> 한글창제의 의미

3> 악장
1. 유래
2. 조선시대의 악장
3. 국악의 정비

4> 시조
1. 시조의 개념
2. 시조의 명칭
3. 시조의 기원
4. 시조의 형식
5. 표현 기교
6. 시조 주제의 변천

본문내용

김종서의 시조: 무인으로서의 독특한 개성
자연의 시조
변개량, 맹사성: 단순한 음풍농월의 경지를 넘어 자기 발견, 자기 개성 표출, 시대상 표출
성종(1457-1494)의 시조
. 악학궤범, 두시언해,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동국통감
. 악학궤범: 성종 24년(1493) 왕명에 의해 성현, 유자광, 신말평, 김복근 등이 장낙원에 있는 의궤, 악보를 교정하여 편찬, 9권3책, 정읍사, 동동, 처용가, 정과정곡, 한림별곡 수록
. 시조에도 일가견
이시렴 부듸 갈힝 아니가든 못할쏘냐
무단히 네 슬튼야 다의 말을 드럿느냐
그려도 하 애달도라 가는 힝을 닐너라
성종이 유호인을 보내면서, 왕으로서 신하를 사랑하는 마음과 기교가 잘 나타남
송순(1493-1583)
. 20세에 급제하여 77세에 의정부우참찬겸춘추관사 제수받음
. 담양에 면앙정 정자
. 명종 때 을사사화: 윤원형의 횡포를 풍자한 시
곳이 진다힝고 새들이 슬허마라
빛람에 흣다리니 곳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젓는 봄을 새와 무삼힝리오
. 연에서 한 기생이 이 노래를 부르자 진복창이 문초, 기생은 작자를 밝히지 않았음, 면앙집에 실려 있음
. 50세 때 개성유수, 황진이와 사귐
. 회방연:81세, 면앙정에서 잔치, 왕이 꽃과 술 하사
. 송강, 고봉, 임제, 관찰사, 사또들이 가마를 메다.
. 명종이 옥당에 숙직하는 관리들에게 황국화를 보내고 시를 짓게 함
풍상에 섯거틴 날잎 갓 피온 황국화를
은반에 것거 다마 옥당에 보내실사
도리야 곳이온양 마라 님의 힝들 알쾌라
임제(1549-1587)
. 청초 우거진 골에 자다다 누엇다다
홍안을 어듸 두고 백골만 무쳤다이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 힝다라
. 한우라는 기생에게 준 시조
북창이 밑다커늘 우장 업시 길을 난이 어이 얼어 잘이 무싶 일로 얼어 잘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칭비로다 원앙침 우취금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칭 비 마잣시니 얼어잘힝 힝노라 오늘은 칭 비 마자신이 녹아잘까 힝노라
베개, 이불, 자다 등의 단어가 있으나 야하지 않다.
정철
재너머 셩권룡 집의 술 닉단 말 어제 듯고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 팅고
아희야 네 궐롱 계시나 정좌슈 왓다 힝여라
황진이
. 가계 등 모든 부분이 미상, 많은 전설을 유포시킴
. 한시 4수와 시조 6수를 남김
. 외로움의 시인: 소판서, 지족선사, 서경덕
동짓달 기나긴 밤에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 송순에게 시를 배웠다.
홍낭: 최경창의 애첩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창 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샛닙곳 나거든 날인가 녀기소서
. 최경창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음
. 임진왜란 때 최경창의 글을 보관
. 문병, 명종 왕비 인순왕후 국상중이라 파직당함
윤선도(1587-1671), 고산
① 광해, 인조, 효종, 현종 등 당쟁이 치열했던 불행한 시기를 산 인물
② 85세의 일생은 향리생활과 유배생활(약 20여년)
③ 1차 유배: 이이담의 탄핵, 30세 백면서생으로 이이담을 탄핵함(감언의 士)
상소가 임금에세 도달하지 못하고 경원으로 유배, 부친 관찰사에서 파직, 1년 수 경남 기장으로 이배되어 인조 즉위싸지 8년간 유배, 유배중 부친 사망
④ 해배 후 과거 급제, 봉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다.
⑤ 속유들의 시기로 성산현감으로 좌천, 삭탈관직, 해남에서 전원생활
⑥ 병자호란- 식구와 노복 데리고 강화도(인조가 그것으로 간 것으로 알다)로 가다가 강화가 함락되고 영남으로 피란갔다는 말을 듣고 해남으로 돌아오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했다는 말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여생을 보내겠다며 탐라(제주도)로 가다.-도중에 보길도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부용동"을 짓고 정착-고향을 오가며 시작행활
⑦ 52세에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음(항복한 나라에는 벼슬하지 않겠다.)
⑧ 2번째 유배생활: 난시에 왕을 찾아와 문안하지 않았음, 피란한 여자들을 약탈하여 해중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렸음-영덕으로 유배(1년): 보길도의 설화(송강 여자 종아리, 연꽃)
⑨ 3번째 유배(72세)
효종이 승하, 조대비(인조의 계비)의 복, 서인 송시열은 1년, 남인 미수 허목은 3년을 주장, 패배하여 삼수로 유배, 유배지에서도 굽히지 않음, 6년 후 광양으로 이배, 현종 8년 석방(81세)
⑩ 윤선도의 작품(귀향문학)
유회요, 우후요: 경원 유배지에서
산중신곡 20수, 산중속신곡 20수: 영덕 유배지에서
어부사시사: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중일 때
몽천요: 서울 근교 고산에서
⑪ 자연의 관조, 연군, 충국의 정
⑫ 고산과 송강을 비교하면, 고산이 진솔하고 체험을 통한 가슴에서 울어나오는 시를 썼다면 송강은 기교를 앞세우며,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의 마력을 앞세운 시라 할 수 있다.
송시열
이현보
신흠
김천택, 김수장
평민 시조인들의 가집 편찬
영조
① 노래에 관심이 많았으며 세종 다음가는 임금이었다.
② 역대 임금들의 악장을 엮었다. :해동악장(1765, 영조 41)
③ "효억편"이라는 노래를 짓다.(1765)
④ "악학궤범" 서문을 짓다.
⑤ 음악이론가 서지수(1714-1768)이 영의정이 되었다.
⑥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직업적인 가수들이 나타났다.
⑦ 이세춘, 김천택, 김수장: 목청을 길게 뽑는 전문가수(직업적)
⑧ 김천택과 김수장은 "경정산가단"을 만들어 시조를 직업적으로 부르면서 후배 양성
⑨ 김천택은 1828(영조4) "청구영언" 자작 시조 수십수
⑩ 김수장은 1763(영조39) 해동가요 자작 시조 139수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사대부들과 나란히 했다.
⑪ 시조 책이 요청되지 않는 시대에 시조 책을 낸 이유: 이름 있는 사람들 틈에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하고 싶다.
⑫ 목청을 길게 뽑는 창-사설시조-타령-판소리
시조집 편찬
① 병와가곡집(1790년대, 이위상) 단,장가 1109수
② 악부
③ 화원악보
④ 교주가곡집(1910, 일본) 단,장가 1780수
⑤ 시조문학사전(1966, 정병욱) 당,장가 2360
⑥ 시조전서(1972, 심재완) 단,장가 3350수
⑦ 시조류취(1928, 최남선)
⑧ 시조전집(1936,신명균)1678수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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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8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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