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화의 성격과 이론적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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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 근대화의 성격과 이론적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2. 네 가지 기존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1) 편입 이전 차이론
2) 외압차이론
3) 지배계급의 성격 및 위기 대처방식 차이론
4) 복합요인론

3. 비교사적 시각에서 본 일본 근대화에 대한 네 가지 새로운 해석
1) 중국 중심의 세계체계내 위치 : 16세기 기원론
2)경제인가 정치인가 : 또 하나의 편입 이전 차이론
3)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의 조선의 역할 : 조선 역할론
4) 외압차이론에 대한 새로운 반론, 핵심부 헤게모니 경쟁과 그 결과

4. 결

본문내용

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소비시장 '중국'이 있었으니 미국은 결코 그 주도권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메이지정부가 강화도 조약 체결을 통해 얻은 것은 그 밖에도 많다.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물론 이 이득은 불평등 조약을 통한 경제적 이익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물론 이 이득은 불평등조약을 통한 '착취적'성향이 강한 것들이다. 조선 국내에서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관세도 없었다. 중개무역을 중심으로 한 대조선 수출이 크게 증가했고 그만큼 일본상인의 자본축적에 기여했다. 특히 금과 미곡의 탈취는 일본 경제발전의 중요한 공로자였다. 일본에 비해 낮은 가격의 쌀은 일본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금은 일본의 국부를 증대시키는 동시에 당시 국제무역의 결재수단이었던 '금본위제'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과의 무역은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잠시 청에 의해 위축됐지만 일본의 이익이 심가할 정도로 줄어든 것은 아니며 청일전쟁 이후에는 그나마 다시 회복된다. 결과적으로 조선과의 약탈적 무역은 일본 초기 자본축적 달성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4) 외압차이론에 대한 새로운 반론, 핵심부 헤게모니 경쟁과 그 결과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본 근대사의 성공요인을 외압의 차이에서 찾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를 단순한 외압의 차이가 아닌 외부지원의 차이로 보고자 한다. 일본이 보여준 개국 이후 주변부 → 반부변부 → 핵심부의 경로 곳곳에 구미 열강의 지원 흔적을 지울 수 없다는 얘기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묵시적이든 공개적이든 구미 열강들은 일본의 발전에 장애나 위협보다는 지원의 경향이 훨씬 강했고 조선과의 비교에서 이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메이지유신 자체가 영국의 지원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860년대 중반 이후 영국은 일본의 문호를 더욱 개방시키기 우해 바쿠후토벌파를 회유하고 지원했으며 프랑스의 바쿠후지원을 막았다. 둘째, 일본에 국제적 지위를 보장하고 미국으로 하여금 조약개정의 단초를 얻어낸 조선의 개국 역시 그 배경에는 열강, 특히 영국과 미국의 개입이 있었다. 셋째, 강화도 조약 후 일본이 관세 자주권을 얻게 된 것에는 동아시아지역에서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려던 미국의 양해와 지원이 있었다. 넷째, 청일전쟁에서 열강은 적극적으로 일본의 공세를 막지 않았다. 청의 요청으로 영국과 미국이 중재에 나섰지만 적극적인 자세는 아니어서 쉽게 물러나고 말았다. 일본의 승리가 대부분의 열강들의 국익에 위배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요동지방에 이해관계가 있던 러시아만이 3국 간섭을 주도하면서 일본의 요동점령에 반대했을 뿐이다. 다섯째, 일본이 핵심부로 이전하는 결정적 계기였던 러일전쟁에서 열강들의 지원은 훨씬 노골적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거액의 군비를 일본에 제공했을 뿐 아니라 순양함 등을 판매, 일본의 해양력을 강회시켜 줬고 나아가 영국은 러시아 발틱함대의 일본 진출을 방해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구미 열강들의 일본 지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열강들 자국의 이익과 관련된느 것이었겠지만 자국의 이익은 곧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헤게모니 쟁탈전은 서구 자본주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궁극적으로 일본은 물론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3국의 자본주의 편입과정은 구미의 헤게모니 및 자본주의 변동의 종속변수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일본 및 조선의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강들의 국내외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4. 結
한일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어쩌면 우연인지 모른다. 일본의 바쿠후가 한창 위기에 빠져 있을 무렵 방문한 페리의 '흑선'부터가 그렇다. 미국이라는 낯선 국가의 방문객은 이후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요인을 제공했다. 메이지유신의 성공배경에도 이러한 '우연'이 자리잡고 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등 대외팽창의 핵심 국가들이 중국문제로 여념이 없던 사이 일본을 개국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거두어 들여야 했던, 바로 그때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 및 중동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그 시기는 그야말로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 해석에는 흔히 있을 수 없는 질문이라고는 하지만 '만일' 미국이 좀더 일찍, 혹은 좀더 늦게 내란을 겪었다면 어떤 양상이 전개되었을까. 일본의 개국이나 메이지유신은 더 늦어졌거나 다른 결과를 야기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 개국에서 보이는 '우연'적 요소도 이에 못지 않다. 일본이 한창 내란으로 빠질 무렵인 1863년 등장한 대원군은 구미 열강 어느 나라에도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쇄국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대원군 정권이 물리친 개국압력만 수건에 달하는 것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을 통해 외세를 물리친 신미양요는 그 중 압권이며, 대원군의 하야 시기는 더욱 절묘하다 하겠다. 1873년 일본의 이른바 '10월 정변'과 동시에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였고, 대원군은 정권에서 물러났다. 이 두 개의 사건은 전혀 관계없는 양국이, 전혀 인과관계없이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새로운 양국 지배층의 이해 관계 및 대응자세가 조선의 개국을 이끌었음은 물론이다. 그 밖에 일본 근대사에서 우연적 요소는 몇 가지를 더 꼽을 수 있다. 미일 통상조약이 한창 진행중이던 상황에서 벌어진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사문제는 바쿠후토벌파의 성장을 한층 자극했으며, 1867년 1월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마지막 쇼군 취임과 고메이 천황의 사망은 메이지유신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러한 역사속의 우연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역사변동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1. 한민수, 일본역사, 도서출판 보고사, 1999
2. 존W.홀, 일본사, 역민사, 1986
3. 피터두우스, 일본근대사, 지식산업사, 1983
4. 김장권, 하종문 공저, 근현대일본정치사,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2000
5. 이시재, 이종구, 장화경 공저, 현대일본사회론,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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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2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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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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