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역사인식 연구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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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고려사}의 교감, 역주 현황

3.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과정과 주체

4. 사관과 서술상의 특징
1) 두 사서의 비교
2) 유교사관

5. 맺음말

본문내용

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민본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이념적인 것일 뿐이고, 고려전기에 있어서는 인간에 대해서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후기 성리학 도입이후 원론적으로는 인간들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현실적으로 차별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민본 사상을 말하지만, 그것은 신분적인 차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원론적인 평등과 더불어 기질에 따른 차별을 긍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차별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민본사상이란 지배층의 체재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물론 민들의 사회적 성장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민을 객체로 보는 시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역사인식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5. 맺음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고 해도 덜 경직된 태도로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자료를 중시하여 직서주의에 입각해서 서술한 것도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 받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렇지만 그 서술에 있어서 사가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입장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왕권과 신권의 논리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차이를 설명하는 이론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이러한 생각을 큰 틀에서 동의하였다. 즉, 건국 초에 혁명파 사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당시 정도전에 의해 고려시대사가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혁명파 사대부들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어, 이후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개수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태종이나 세종이 원한 서술 방향은 신료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주가 되는 역사 편찬을 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서술을 하는 신료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방향에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계속 마찰을 일으키다가 세종 사후에 『고려사』의 완성을 보게 되지만, 여기에는 세종의 뜻이 반영되어 있어 김종서 등은 『고려사절요』를 만들어 자신들의 사관으로 사서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두 사서의 차이는 체재나 서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전체가 인물 중심의, 열전이 주가 되는 사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정사에 비해 세가의 비중이 큰 것은 세종의 의지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서는 열전에 수록되지 않은 신료들의 기사도 기록하고 있으며, 사론도 『고려사』의 3배가 넘는 양을 붙이고 있어 사대부들의 사관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가 있기는 하나 크게 보아 두 사서가 전혀 다른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두 사서 모두 유교사관에 입각하였는데, 여기서 유교사관이란 교훈적이며, 왕조중심적이고, 순환사관이면서 유교적인 합리성을 가진 사관이라고 하였다. 두 사서는 모두 교훈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러한 성격은 『고려사절요』가 좀 더 강하였다. 또, 고려에 대해서는 그 전기를 이상적인 사회로 후기를 혼란한 사회로 보았다. 그리고 불교 관계 기사 등이 소략한 것은 유교적 합리성에 의해 비판적으로 봤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편찬자 개인에 대한 연구이다. 편찬자 하나하나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져 있지 않은데, 실제로는 이 부분도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또 다른 하나는 편찬의 근거가 되었던 각 典據에 대한 연구이다. 이는 특히 各誌를 연구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어떠한 기록을 근거로 작성되었으며, 이들은 당시 사회상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인가 하는 것은 고려 시기 연구의 기본적인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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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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