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역사서술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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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삼국시대의 역사서와 역사서술

3. 삼국시대 금석문의 역사서술

4. 맺음말

본문내용

가 보이며, 북한산비에는 진흥왕을 강력한 영토확장 의지와 부합하는 '太王'이라는 강력한 왕권 상징의 표현과 유교적 문장, 중앙집권구조 하의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의 단면이 나타나 있다. 황초령비에도 세련된 유교문장의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국왕 近侍職 정비 사실을 통해서는 당시 왕권의 수위를 파악할 수 있다. 마운령비에는 앞서 언급한 내용에 더하여 '太昌'이라는 연호가 등장하고 있어, 眞興王代 정점에 오른 왕권의 위치를 함의하고 있다.
이상의 금석문 자료 검토 내용을 놓고 본다면, 신라의 금석문 기록상에서 직접적으로 역사 의식을 언급한 바는 없으나, 『國史』의 편찬 주체였던 眞興王를 기점으로 그 이전 단계의 기록에서부터 眞興王代까지 점진적으로 강조되어 가는 논리는 바로 국왕 및 국가의 상징적 권위와 실질적 위치의 절대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러한 논리가 眞興王代 신라 사회의 관념을 아우르고 있었다면 『國史』의 편찬 의도나 그 성격도 이 범위에 준하는 하나의 國事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결국, 한국 고대에는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당대 편찬된 역사 기록이 존재했다. 물론 그 기록들이 존재하지 않아, 보다 생생한 당대의 사건과 기억과 증언과 입장을 취득하기는 힘들지만 존재했다는 사실이 있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관한 논의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존재했다는 역사 기록 및 역사서의 성격에 주안을 두었다. 그 결과 고대의 역사 기록과 역사서는 『留記』와 같이 지배 집단의 위상 또는 『新集』·'書記'·『國史』와 같이 국왕 중심의 국가 권력 정통성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이념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留記』에서 『新集』으로의 刪修, 그리고 『國史』의 경우에서처럼 국왕이 등용한 신진 세력 주도의 修撰 사례는 고대 역사 기록 및 역사서가 고대 국가의 권력과 집권체제가 국왕을 중심으로 강화되어 가는 상황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과정을 효율적으로 증언해주는 근거이다.
분명히 한국 고대 사회의 역사 기록 및 역사서는 그 기록의 관심이 사회 보편의 사건과 기억과 증언과 입장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특수의 사건과 기억과 증언과 입장에 집중되는 성격의 것이다.
고구려 천하관 왕의 정통성, 신라 유교적 인식 둘은 따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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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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