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무역 정책 - 대외무역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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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론

2. 고려의 상업정책
(1) 공무역과 사무역
(2) 충혜왕의 중상정책
(3) 공녀(貢女)

3. 고려의 상업제도
(1) 화폐(貨幣)
(2) 상인에게 부과된 세금

4. 고려의 상인
(1) 선박과 교역로
(2) 벽란도
(3) 개성상인

5. 결 론

본문내용

지키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벽란도 도승(渡丞)을 두었는데 우도수참전운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이 그 직을 겸하도록 했다. 고려가 멸망한 1392년에는 벽란도에 있던 호수가 이틀 동안 붉은 빛을 띠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 것처럼 고려의 멸망과 벽란도의 황혼은 일맥상통하는 의미가 있다.
김인호,『고려 이야기』pp.98 100.
(3) 개성상인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서 상인들은 천하다는 생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상인들이 이윤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짓을 많이 하며 따라서 이들에 비하면 귀족들이나 사대부는 고상하다는 생각이 그 이면에 깔려 있었다. 상인들의 업은 천사(賤事)내지 천기(賤技)로 간주되어 천사자(賤事者)로 취급을 받았다. 상인들은 스스로 양인의 신분에 축에 들었는데, 호적상에서도 성(姓)이 주어졌는데, 천인은 성이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양인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관직에 나아가는데 있어서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애매한 신분 축에 들었다.
신또한 생각건대 사민 가운데 농민이 제일 고달프고 공장은 그 다음이며 상인인즉 아무일 없이 놀면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누에치지 않고도 비단옷을 입고 지극히 천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부유함은 공실을 능가하여 참람하게도 왕후에 비기어지니 진실로 태평시대의 죄인입니다.
『高麗史節要』 권35, 恭愍王, 3年 3月.
상인들은 통관세 등과 같은 세금을 내고 있었지만, 농민이나 공장과 같은 명확한 상세(商稅)는 부과되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부담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며, 일정량의 액수를 납부해야 했다.
김란옥, 「고려시대의 상인신분」『한국중세사연구』5호, pp.44 48.
고려시대는 시전과 같은 좌상이 증가하고, 유통경제의 발달로 전업적 상인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말기에는 왜구의 자진 침탈행위로 반물품화폐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고 그레샴 법칙의 작용으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여 물가품귀를 촉진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점매석하거나 불량 도량위의 사용 등으로 폭리를 취하는 천민상인층이 형성되었고, 고려 말에는 상업을 천시하고 통제하려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시전상인에게 더럽게 돈을 벌어서는 아니된다는 도덕성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개경의 시전상가에는 영통(永通), 통상(通商), 광덕(廣德), 흥선(興善), 존신(存信), 행손(行遜) 등의 정신이 있었다. 영통은 상품의 영속적 유통으로 상인의 사명을 다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통상은 외국무역의 장점을 인식한 중상주의적 사상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광덕과 흥선은 덕을 넓히고 선행을 일으키자는 도덕성을 강조한 것이다. 존신는 신용이 필수 불가결함을 말하고 행손은 고객에게 공손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시대의 상인정신은 상인의 기능과 사명의 정신, 상인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목표, 당면한 경영신조 등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지배층에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말업시(末業視) 하는 사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비하면 일반적으로 상업을 천시하지는 않았다. 그려가 망한 뒤에 많은 개성인들이 상업에 진출한 이면에는 그들의 반조선적 사상 이외에 긍정적인 상업관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김성수, 2002,「개성상인 발달사 연구」『경영사학』 제17권, 제2호, pp.4 5.
5. 결 론
지금까지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대외상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대외상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연결 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고려가 관계하고 있던 이웃 나라들과의 연관성이었다. 즉, 무역이라는 것이 역시 이웃나라의 외교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대외상인의 모습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활발한 것이었다. 때때로 무력을 통해서 해로를 지키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있었고 또 국경지방에 시장을 벌려놓고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도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무역체계가 조공무역이라는 형태를 갖고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조공무역이라는 것은 비록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세계 내에서의 질서를 규정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나타낸다. 즉, 중국의 왕조들을 중화사상의 한 가운데로 놓고 그 가운데에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서 복종을 요구하는 일종의 명목상의 질서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고려는 중국에 대하여 조공을 바쳐야 하는 나라였듯이, 거란과 여진이 왕조를 구성하기 전에는 고려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나라를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궁금해지는 것은 중국의 왕조들이 바뀔 때마다 이러한 고려의 위정자들은 항상 그 질서를 깨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란도 여진도 이러한 질서를 깼고 자신들의 중심으로 질서를 재편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고려를 비롯하여 조선도 이러한 질서를 깨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외상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화폐제도였다. 화폐제도가 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의 역학관계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원의 세력 하에 고려가 들어갔을 때, 원의 화폐의 세력권 안에 고려가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달라가 전 세계의 유통화폐의 기준이 되듯이 말이다.
■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圖景』
高柄翊. 1991.「제3회 환황해 (環黃海) 한중교섭사연구 (韓中交涉史硏究) 심포지움 - 고려시대 한중교섭의 제양상 - 제2부: 麗代 東아시아의 海上通交」『震壇學報』. 1991. 71권.
김성수. 2002.「개성상인 발달사 연구」『경영사학』 제17권. 제2호.
金玉根. 1996.『高麗財政史硏究』 一潮閣.
김인호. 2001.『우리가 정말 몰랐던 고려 이야기』경기 ; 도서출판 자작.
박용운. 2002.「고려시대의 상거래 수단은 무엇이었을까」『고려사람들의 이야기2 - 경제 사회생활』 서울 ; 신서원.
朴龍雲. 2002.『高麗社會의 여러 社會像』신서원.
朴龍雲. 2002.『高麗社會의 여러 社會像』신서원.
張東翼. 1994.『高麗後期 外交史硏究』一潮閣.
전병무. 「고려 충혜왕의 상업활동과 재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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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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