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일본의 대외인식 변화와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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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문제의 제기

Ⅱ. 메이지 유신 이전의 대외인식 -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사상계의 동향을 중심으로

Ⅲ. 메이지 시대의 대외인식 - 정한론․탈아론․연대론을 중심으로

Ⅳ. 변화된 대외인식과 한․일 관계 - 강화도 조약에서 한일합방까지

Ⅴ. 결론

본문내용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국의 개입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내의 일본의 영향력 약화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태전개는 1880년대에 들어서 일본내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아시아에 대한 우월적 자기인식에 있어서, 일종의 굴욕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일본의 위기감은 한층 고조되었고, 80년대 중반의 연대론, 탈아론의 논의들의 근간에 있어서 일본의 국방력 강화라는 면에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을 제공하여 주었다. 1894년에 들어 결국 조선에 대한 영향력 회복을 목표로 하던 일본과 청국간에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기간에 일본은 향후 영향력의 확대를 목표로 조선내에서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을 탄생시키고, 갑오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이 과정은 초기에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 회복이 목표였으나, 청·일 전쟁에서 청국의 일방적 패배로 인해 그 목표는 수정되었다. 그 수정된 목표는 조선의 합병과 청국에의 진출이었다. 청·일 전쟁의 승리는 일본에게 아시아에서의 우월성에 대한 확인과 대 아시아 정책에 있어서의 국론 통합을 가져오는 전환기적 사건이 되었다. 對 조선정책은 청·일 전쟁을 중심으로 하여 식민지화로 그 가닥을 잡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청·일 전쟁 이후의 과정들은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식민지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조선내의 저항세력의 구심점을 파괴해나가는 과정의 시작이었고,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1900년의 청의 의화단 사건에 연합군으로 참가함과 1902년의 영·일 동맹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 상승과 동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04년의 러·일 전쟁의 발발은 동아시아 내에서의 독자적 영역확보의 과정이었다. 러·일 전쟁의 발발과 함께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은 마지막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1904년의 '한일의정서' 체결, 동년 8월의 '한일협약'의 체결을 통해 조선의 재정과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05년 미국·영국과의 협상을 통해서 서로 간에 아시아지역에서의 제국주의적 이권분할이 성립되었다. 러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과 함께 사실상의 조선의 주권을 탈취하게 되었다. 190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은 정부 차원의 마지막 저항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의 해산, 사법권의 박탈, 관리의 임명권의 등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결국 '병합'이라는 절차만을 남겨놓았을 뿐 사실상의 식민지화를 마무리 지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1910년 8월 22일의 '한일합방'을 통하여 이후 35년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게 되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서 처음에 언급하였던, 청·일 전쟁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對 조선정책의 배경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Ⅴ. 결론
먼저 메이지 초기의 침략논쟁의 초점이 조선에 맞추어졌느냐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보자. 이는 지리적인 인접성외에도 가장 중요한 점은 도쿠가와 시대에 양성된 일본의 새로운 자기인식과,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서 굳어져 있었던 조선의 자아인식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밝혔다.
동아시아에서의 '예외'라는 일본의 자기인식은, 후쿠자와의 '탈아론'에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곧 주변세계에 대한 예외적인 입장에서의 '지도력'을 행사하여야 한다는, 간섭과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사명감'의 인식으로 직결되었다. 일부에서는 -주로 민권론자들- 아시아에의 침략을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청일전쟁의 승리와 '삼국간섭'은 제국주의적 침략노선에 힘을 실어 주게 되었다. 이후의 일본의 근대사는 제국주의 국가로서 발전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일본과 조선과의 근대관계사는 도쿠가와 시대 말기부터 형성된, 아시아내에서의 일본의 독자적 위치와 우월성이라는 자기인식과 "전제적이며 문란하며 무기력하며 낙후된 나라"라는 조선에 대한 대외인식 -타루이 토오키치의 조선관- 그리고 일본의 자립과 독립이라는 궁극적 목적 하에서 일본의 여건에 따라 진행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일본 근대의 대외인식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 우리에게 일본에 대한 인식, 적개심과 같은 감정적 대응과 일본을 문화적 후진국 내지 야만국시 하는 일종의 '전통적 일본관'과 유사한 인식이 일본인들에게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전통적 한국관'이라고 학술용어로 까지 정착해 버린 일본인들의 한국관은 일종의 우월관념이었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상호인식의 괴리는 상당히 큰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앞서 정한논쟁에 대한 논의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엄밀하게는 그 역시도 서로간에 잘못된 상대방에 대한 인식, 아니 자아인식에만 빠져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 양국의 근대 관계사가 어긋나기 시작한 단초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한일관계의 건전한, 상호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는 이러한 서로 간의 괴리적 인식을 버리고 실제의 상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한일 월드컵을 통해서 서로의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앞으로의 양국 관계의 상호 발전적인 전개가 계속될 수 있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한·중·일의 근대 정치 사상』. (현음사, 1998). 최영
『일본 역사와 정치 그리고 문화』. (좋은날, 1999). 박동석, 박진우. 최영호
『한일 양국의 상호인식』. (국학자료원, 1998). 한일관계사학회
『근세 한일 관계사 연구』. (이론과 실천, 1991). 三宅英利 / 손승철 번역
『일본 근대사를 보는 눈』. (지식산업사, 2000). 김용덕
『일본 우익 연구』. (중심, 2000). 김호섭, 이면우, 한상일, 이원덕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2000). 原了圓 / 박규태, 이용수 번역
■ 목 차 ■
Ⅰ. 문제의 제기
Ⅱ. 메이지 유신 이전의 대외인식 -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사상계의
동향을 중심으로
Ⅲ. 메이지 시대의 대외인식 - 정한론·탈아론·연대론을 중심으로
Ⅳ. 변화된 대외인식과 한·일 관계 - 강화도 조약에서 한일합방까지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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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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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6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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