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과 중국공산당의 권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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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모택동 이데올로기의 실체

3. 통치사상에의 도전

4. 이데올로기와 조직의 갈등

5. 조정정책과 모택동의 반격

6. ‘주자파’에 대한 인식

7. 결론

본문내용

반수정주의 운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교육운동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운동이었다.
) 王年一, "試驗'文化大革命的'由來", 黨史硏究(1982년 제1기) (1982.2),p27
이렇게 하여 이른바 사회주의시기 모택동의 계급과 계급투쟁에 대한 시각이 문화혁명의 지도사상이 되었다. 특히 모택동은 당내에 주자파'와 '수정주의분자'들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일찍이 1957년 10월 그는 중국공산당8기3중전회에서 중국의 주요한 모순은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모순이며 사회주의 길과 자본주의 길의 모순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산자료소유제의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된 것을 전후하여 계급관계, 계급모순의 차이성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958년 11월 그는 武昌會議에서 다시 중국은 여전히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주, 자산계급의 전횡이 존재하며, 아울러 1959년 여산회의에서 그는 팽덕회 등과 갈등이 겪으면서 무산계급이 자산계급에 반대하는 생사를 건 투쟁을 계속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 그는 확고하며 전체 사회주의 사회의 역사단계는 모두 자산계급이 존재하며 자본주의 복벽의 위험이 존재한다고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1964년 12월 그는 명확하게 '관료주의자 계급'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지도자들'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관료주의자 계급과 노동자 계급은 첨예하게 대립되는 계급이며,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변하였거나 혹은 바로 노동자들의 피를 빠는 자산계급으로 변하여 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965년 1월 당중앙이 제정한 '농촌사회주의 교육운동 중 현재 제시된 몇 가지 문제'는 모택동의 의견에 근거하여 '당내 주자파'의 개념을 제시하였고 아울러 '四淸'운동의 핵심대상을 당내의 자본주의 길을 가려는 당권파를 정리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모택동의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의 문제는 유소기로 대표되는 '주자파'에 대한 공격을 위해 이용한 이론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문화혁명의 예행연습과도 같은 것이었다.
7. 결론
문화혁명은 소위 '무산계급독재하의 계속혁명 이론'의 지도하에 혁명적 '좌파'가 '주자파'와 '자산계급의 반동 학술권위'를 타도 대상으로 삼고 일으킨 대중운동이었다. 따라서 문화혁명은 결코 하루 아침에 나타난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한 개인의 의지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은 모택동이 자신의 권력약화를 강화하기 위하여 대항세력이었던 유소기를 공격하기 위하여 발동한 것이었다. 따라서 모택동과 유소기의 갈등을 하게 된 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요인이었고, 그러한 요인이 결과적으로 문화혁명을 발동하였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모택동은 자신의 통치사상의 핵심이었던 '모택동사상'의 퇴색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조성하게 된 유소기로 대표되는 당권파들의 부상과 그들에 의해 요구되는 집단지도체제의 강화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개인숭배'를 시도하게 되었다. 중국은 비록 사회주의 혁명은 성공하였으나 수 천 년 간에 걸쳐 봉건주의 통치를 경험하였고 국민 대다수가 전통적으로 농민인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탄생한 국가이다. 따라서 모택동은 중국 전제봉건왕조에서 실행하였던 개인숭배의 방법을 권력투쟁에 원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러한 전통왕조식 개인숭배를 위해 군중들을 이용하였으며 일종의 맹목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둘째, 권력투쟁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 모택동의 이데올로기의 강조와 유소기의 조직의 강조로 말미암은 당내의 노선투쟁이다. 중국의 소위 당내투쟁은 가장 기본적으로 노선의 옳고 그름의 문제와 선진과 낙후, 무산계급사상과 비무선계급의 사상 간의 모순과 투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과 투쟁은 자주 나타날 수는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자신의 권력약화 원인을 잠재적 대항세력이었던 유소기와의 노선상 패배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추진하여 실패한 경제정책에 대한 만회를 시도하기 위하여 문화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셋째,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소위 권력투쟁이란 통치권쟁탈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권력투쟁은 결국 중대한 노선투쟁의 결과로 나타난다. 특히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모택동은 줄곧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상에 있어서는 혁명전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당시 경제정책에서 실패한 중국 사회를 평가하는 데 있어 당권파와의 파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 이론 만큼 일반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이론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둔 모택동은 권력투쟁의 대상이었던 당권파들을 '주자파'로 공격하였고 그들을 타도하기 위해 대중을 동원하여 마침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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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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