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과 프랑스혁명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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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제제기

2. 사회혁명은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가?

3. 한말의 위기 상황 - 혁명적 상황이었는가?

4. 맺음말

본문내용

이 경지면적의 거의 3분의 1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봉건정부의 재정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 되며 이것은 농민에 대한 더욱 가혹한 수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1862년의 농민폭동들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는데, 이는 폭동군중들이 정치적 구현을 제기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들의 요구를 때로는 청원 또는 소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항의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는 사실과 봉건정부의 기만적 완화정책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을 도식화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스카치폴의 프랑스 혁명 원인 분석과 같은 형식으로 1894년 농민전쟁 이전의 조선사회를 분석하여 보았다. 스카치폴의 프랑스 혁명 원인 분석과 더불어 조선사회의 분석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할 수 있다.
프 랑 스
한 국







군주/지배계급
토지상업적 지배계급이 반(半)관료절대군주체제에서 세력을 장악
군주/지배계급을 대체한 세력(주변적 엘리트)이 미성숙, 지속적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함
농촌경제
성장, 그러나 자본주의적 농업으로 이행하지 못했음
자생적 자본주의 발전으로 서서히 와해되고 있었고 제국주의 침략(개항)이후 농촌경제를 급속하게 와해
국제적 압력
특히 영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전쟁에서 수차 패배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굴복, 봉건사회는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




지방정책
촌락은 왕조관료의 감독 하에 상당한 자율성 보장
중앙관료의 지방파견·감독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 자율성이 미약함
토지소유
-투쟁대상
소작농이 전토지의 30-40%를 소유하였으며 80% 이상을 잘게 나누어 경작 : 개인소유는 보장되었으나, 농민공동체는 부과조를 징수하는 영주에 반대
소, 빈농이 80%이상 국가-지주-전호의 중층적 토지소유관계,
가중되는 국가 수탈체제에 반대
4. 맺음말
스카치폴의 프랑스 혁명 분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혁명의 원인이 내적으로는 1)중심적인 행정기관과 조사기관의 붕괴와 자격상실, 2)만연된 농민반란, 3)주변적 엘리트의 정치운동 등을 들고 있고 외적 원인으로는 근대화하고 있는 농업관료국에 가해진 외국 압력의 크기로 들고 있다. 우리는 조선 말기 특히 1894년 농민전쟁 이전의 상황을 스카치폴의 분석방법에 의거해 볼 때 몇몇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차이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혁명적 상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체제를 주체적으로 해체시키지 못하고, 반식민지-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까닭이 아닌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조선의 중심적인 행정기관과 군사기관의 붕괴나 자격 상실을 적어도 1894년 이전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부적으로 임오군란(1882년)이나 갑신정변(1884년)으로 약간의 변동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봉건적 행정, 조사기관의 붕괴를 가져오지 못했다.
둘째로, 주변적 엘리트(민족주의 급진주의자)들의 정치운동이 1894년 이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소위 '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는 계급이 너무 미약해서 어떤 사람들은 갑신정변을 부르주아개혁 또는 혁명(북한의 주장)으로서 파악하고 있지만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이들이 갖고 있는 계급적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입지)을 강화시키려고 했던 쿠데타(政變)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들 소위 '부르주아'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변혁운동에 결코 농민들은 비롯한 피지배계급을 끌어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부르주아의 계급을 대표한 어떠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Marx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모든 새로운 계급은 오직 예전의 지배계급의 기반보다 넓은 기반에서 자신의 지배를 확보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선후기의 개화파를 부르주아(민족적 급진주의자)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셋째, 조선후기 특히 1862년 이후 농민폭동이 만연되어 있었음에도 이런 농민 폭동 1894년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같은 형태로 재현됨으로써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중앙집중적 지배체제가 아직까지 지방에 까지 뿌리깊게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과 동시에 봉건정부의 물적 토대인 토지소유관계가 완전히 사적 토지 소유로 전화되지 못하고 국가적 토지 소유가 상당한 정도로 실현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은 국가의 온·강정책에 따라서 농민폭동이 진정·재현되는 순환을 겪게 된 것이다.
넷째, 근대화하고 있는 농업관료국에 가해진 외국의 압력 크기는 성질상 프랑스 혁명전 프랑스에 가해진 외국압력의 크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경우 영국을 비롯한 유럽제국가와 식민지 패권경쟁에서 실패한 경우이지만, 조선후기의 경우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은 이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을 제공했으며, 1894년 이전의 상황에서는 봉건중국(청)-일-러시아의 치열한 식민지 다툼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반식민지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상이점들이 1894년 농민전쟁이 단지 대국가전쟁의 수준에서만 머무르고 사회혁명만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이러한 제한 점 이외에도 농민전쟁이 혁명적 상황으로 나아가지 못한 거들이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카치폴의 프랑스 혁명의 원인 분석과 비교했을 때 1894년 농민전쟁은 혁명적 사황을 갖고 있었음에도 사회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대국가투쟁(반봉건 투쟁)과 반외세 투쟁으로 한정지워질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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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성, 혁명의 이론사, 인간사랑, 1991.
미셸보벨,정찰렬,신용하외, 프랑스혁명과 한국, 일월서각, 1991.
조선전사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下)
김희재, 조선후기 사회변동의 기본적 성격, 석사논문, 1984
, 근세조선의 민족문제와 민족운동, 민족문제논층1집, 1990
이광린, 한국사강좌, 일조각,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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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1.05
  • 저작시기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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