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정책부터 일제침략기 까지 현대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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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쇄국정책부터 일제침략기 까지 현대사의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되었다.
정미의병의 특징은 첫째, 참가계층이 전 계층으로 확대되어 민족적 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둘째, 사상적으로도 위정척사론에 근거를 둔 유생은 물론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은 신 지식인층까지 의병에 참여하였다. 셋째, 전국13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의병이 일어나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넷째, 종전에는 한국군과 일본군이 합동으로 의병진압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정미의병의 진압은 순전히 일본군이 담당하여 의병활동이 전면적인 항일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정미의병은 1910년 한일합병까지 계속되었으며 합병 후에도 국 내외의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었다.
이후 의병항쟁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합병 후에도 국내외의 독립 전쟁으로 계승되었다.
의병활동의 의의는 한국 민족주의 성장의 기본 원칙을 제시하여 이후의 항일민족운동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아울러 근대민족성장에 큰 요인이 되었다. 법제적인 의미에서는 의병이 국가의 국군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민족의 군대로서 국 가와 민족의 보호 의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의병활동은 식민지시대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근대민족운동사의 큰 맥을 형성 하였다.
한편 1904년 러 일 전쟁 이후 의병활동과 그 노선을 달리하는 애국계몽운동이 크게 확산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양성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양성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활동의 영향을 받은 신 지식인층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으며, 사회운동, 교육운동, 산업개발운동, 언론운동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애국계몽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가장 조직적인 활동은 정치, 사회단계였다. 황무지 개척을 저지하기 위해서 설립된 보안회는 의회 제도를 연구하고 실천하는데 목적을 둔 헌정연구회, 헌정연구회를 계승한 대한자강회, 그리고 교육계몽, 신흥산업을 통한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한 대한협회의 활동들이 있었다. 한편 대한협회와 같은 시기에 반외세노선을 지향하는 세력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활동목표를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교육기관설치, 국민적 부력증진 등에 두었고 실제로 평양에 대성 학교, 태극서관, 자기회사를 설립 운영하였다. 안창호를 중심의 계열은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고 이동휘 중심의 계열은 무장투쟁을 주장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우리나라 애국명장들의 전기나 독립운동의 역사를 번역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지와 역사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6. 일제의 침략과 국권상실
청 일 전쟁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일본은 우선 무력적 대결을 피하고 1896~1898년 3차례의 러·일 협상을 통하여 조선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협상 직후인 1899년 한반도에 진출하여 포경기지를 얻고 1902년에는 마산포까지 점거하여 해군기지를 설치하려 하였다. 또한 1899년 청의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만주에 출병한 러시아군의 의화단 사건이 진압된 뒤에도 철병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은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과 교섭하여 1902년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하는 영·일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고 1903년 약국간의 협상이 결렬됐다. 일본은 이미 러·일 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한국정부가 열강에 대하여 엄정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1904년2월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존한다는 구실아래 내정 간섭과 외교권을 침해하였다. 조약체결이후 일본은 ①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든지 혹은 병합한다.②이러한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정치, 외교, 군사상의 실권을 장학하고 경제면에 있어서는 이권의 확대를 꾀한다는 등의 기본방침을 세웠다. 이어 일본은 러·일전쟁의 전세가 유리한 틈을 타 1904년 8월 『제 1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의 재정권 및 외교권에 제약을 가한 것으로 한국 식민지화의 제 2단계라 할 수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바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1905년 11월 고종이 불참한 어전회의에서 강제로 외교권 박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 또는 『제 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한국은 외교권이 완전히 박탈되어 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 지위가 말살되었으며, 일본의 통감이 외교 뿐 아니라 내정까지도 좌우하는 이른바 식민지화 제 3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일본의 만행에 대해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미국에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호소문을 전달하려다 실패하였고, 민영환 · 조병세 등 전 · 현직관료들은 자결로서 항쟁하였다. 또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무력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항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1907년 6월 고종은 억울한 사정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을 비롯한 3인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열강들의 비협조로 회의 참석조차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갔고 고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강제로 폐위되고 말았다.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킨 일본은 1907년7월 『한·일신협약』 즉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통감이 정식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하고 고문정치를 차관정치로 바꾸는 등 식민지화 제 4단계 공작을 실현하였다. 이어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에 관한 칙어를 내리게 하여 군대해산을 단행하였고 1909년 7월에는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강탈하였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식민지화 과정을 밟은 일본은 1909년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을 구실로 한국병합에 박차를 가하여 마침내 1910년 8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서 한국은 일본의 완전 식민지로 전락했다. 결국 대한제국 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러한 정부를 무너뜨리고 국민주권 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국민적. 역사적 조건, 일본의 야만적 침략주의와 이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원조 및 승인 등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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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1.24
  • 저작시기2004.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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