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의 이해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의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분명히 볼 수 있다. (단군조선-부여`삼한-고구려`백제`신라-발해`신라-고려-조선) 반면 전근대 역사학이나 韓末의 소위 新史들이 전제했던 箕子와 三韓 위주의 역사인식은 儒敎文明의 普遍性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朝鮮王朝 때까지 일정한 의미가 있었을 뿐, 개별 민족국가가 세계경쟁의 단위가 된 근대사회에서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더구나 한말은 世界主義와 東洋主義가 기세를 떨치면서 조선이 근대 문명의 강력함에 흡수되어 국가의 형체마저 보존하기 어려운 형국이었다. 따라서 그의 전통사학 극복의 방향은 이전까지 왕조 중심이었던 歷史의 主體를 民族 全體로 擴張해야 한다는데 두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고대사인식을 단순하게 국수주의적인 자기만족 - 현재의 재야사학에서 고대사의 영광을 재현하고자하는 유치한 역사의식쯤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 결국 그는 근대적 민족주의를 전제하지 않고서 여타의 분야를 서술했다가는 시대착오적인 역사나 無精神의 역사만을 산출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朱子學的 正統論은 버렸지만, 種族·民族을 기준으로 하는 正統論은 굳게 지켰던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적 시각은 서구의 전통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동양과 조선의 오랜 역사 정리의 경험에서 기반하여 근대적인 자기혁신을 이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정인보의 역사학
그는 본래 漢學者 출신으로, 처음부터 역사가로 立身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규식·신채호·박은식 등을 만나면서 그들의 학풍에 접하게 되었고, 귀국 후에는 국학자로서 여러 역사적인 자료를 정리하게 되었다. 그 후 일제하에서 우리 역사가 왜곡되고, 특히 고대사부분이 완전히 날조되어 우리 역사가 중국 및 일본 식민지로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날조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역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全역사를 민족사라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체계화하였는데, 특히 일본이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온통 고대사를 왜곡하면서 한국역사의 출발부터 식민지의 역사로 만들어 놓는 것에 대해 분격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이 漢四郡을 평양으로 설정하며 온갖 유물로써 이를 사실로서 확정하려 하는 시도(『朝鮮古蹟圖譜』와 낙랑박물관 등)에 대해, 이를 일본인들의 조작이라고 전면 부정하면서 漢四郡이 압록강 이남에 있지 않고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주장하였다. (『朝鮮史硏究』). 그것은 결국 현실의 영토는 상실하였지만, 마음의 영토까지 상실해서는 안되겠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하에 신채호가 구축한 고대사의 체계를 더욱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그는 단군 史實을 전하는 「三國遺事」와 「帝王韻紀」 등에는 神話부분과 史實부분이 있으나, 일제 관학자들은 神話부분의 架空性만을 들추어내고 史實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그들의 文獻考證에 입각한 檀君否定論이 근본에서 잘못된 것이며, 단군전설에서 神話부분은 시대에 따라 可變이나, 史實부분만은 不變의 史源과 實體가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신채호의 立論을 근거로 하여 古朝鮮의 政體가 最高의 "한"인 辰韓을 元首로 하고, 그 아래 馬韓과 弁韓의 두 "한"이 있어, 元首이자 總王인 "한"을 두 裨王이 輔佐하여 衆多한 諸小國을 分統하는 政體이며, 村落 역시 곧 一國家의 축소형으로서 村干과 部長이 分統하는 체제로 보았다. 따라서 古朝鮮의 政體는 王으로부터 내려올수록 統轄이 遞分되면서 最下 村落까지 부하에 대한 訓治가 째이고, 村落으로부터 올라갈수록 管制가 總集되면서, 最上元首로서 거느린 전체에 대한 權柄이 집중되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상하의 固結을 완전히 한 고조선의 政體를 특수형의 封建國家라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신채호에 있어서 다소 막연하였던 上古史의 정치제도를 동양 고유의 봉건제도로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밖에 이시기에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崔南善의 연구 경향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일제 관학자와 달리 檀君을 중요시 하였지만 단지 神話 혹은 巫俗의 차원으로 認識하는데 그쳤다. 그 결과 중국과 구별되는 동북아시아 및 일본 문화의 원류를 밝히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고조선의 開國君主로서 歷史化시키는 작업은 소홀히 하였다. 이들은 일제에의 저항과 조국의 독립에 바탕을 둔 철저한 歷史意識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 김용섭, "우리나라 近代歷史學의 成立", 「韓國의 歷史認識」下, 1976, 447쪽.
결국 중국과의 명백한 구별을 통한 동북아시아의 지배를 꿈꾼 日帝의 滿鮮史觀에 이용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단군을 神話의 한도에서 인정한다는 점에서, 전면적 부정을 의도하거나 혹은 일선동조론을 주장한 日帝의 연구와 대립하면서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고 하겠으며, 단군을 철저히 민족국가의 출발로서 歷史化했던 신채호·정인보의 관점과 명확히 대비된다고 하겠다.)
한편 정인보는 자신의 사론을 '얼' 사관으로 정립하였다. 이를 단순하게 관념론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세상에 관념론 아닌 역사가 없다. 인간사회에 있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人心이며, 人心의 변화가 곧 歷史라고 믿은 그는 그 변화하는 人心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民族精神, 즉 '얼'이다. 이 때 과거의 사실은 과거의 일로만 끝나지 않고, 현재와의 연관 속에서 인식되어야 한다.("우리를 껍데기에서 찾기 때문에 고인이 우리가 아니요 우리가 고인이 아니지, 한번 그 얼에 들어가 생각해보면 우리의 고인이 곧 우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인의 지난 행적을 좇아 그 精髓를 접하면, 이 혈맥이 곧 내 혈맥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한 즉 과거는 의연히 살아 있는 것이니 누가 지나간 진부한 일이라 하는가?") 이러한 시각에 선다면 단군 조선이래 우리의 국가운영의 모든 축적된 경험이 곧 우리의 현재로 되어서, 식민지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과거 현재 역시 과거 속에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얼이 없이 일본인 연구자들처럼 단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유물만을 수집하여 이를 근대적 실증이라고 강변하는 역사, 그리고 이에 추종하는 식민지 조선인의 역사의식은 진정한 조선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4.01.27
  • 저작시기2004.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234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