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시장의 활성화 전략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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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History Of Dong-Dae,Mun
1)동대문의 과거사
2)동대문의 발전사
3)동대문의 현 상황

2. 외국 시장과 비교
1)홍콩
2)일본(하라주쿠)
3)영국(런던)

3. SWOT분석
1)강점
2)약점
3)기회
4)위협

4. 동대문 활성화 전략 제시
1)주위 환경 개선 방안
2)쇼핑환경 개선 방안
3)지역 정비 환경 방안
4)시장 환경 개선 방안
5)홍보전략
6)국가 지원적 전략

5. 결론

본문내용

1)동대문의 과거사
원래 동대문은 남자들은 들어갈 수가 없는 푸성귀시장으로써 채소를 주로 파는 채소 시장이 였다. 당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영원으로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이였던 송비는 궁성으로 들어갈 것을 거부하고 동망봉 아래 초가암자에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이때 송비가 수양대군이 보내주는 양식도 마다하고 손수 옷감에 물을 들여 근근히 생계를 이어간다는 소문이 장안 아낙네들 사이에 퍼지자 부녀자들은 이를 도우고자 채소, 과일 따위를 들고 장을 세웠는데, 정부에서는 이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때 아낙네들은 정부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채소시장을 만들고 밀고자들을 막기 위해서 8세 이상 남정네들의 출입을 막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가엾고 가련한 여인을 돕기 위한 조선 아낙네들의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이곳 동대문 푸성귀 시장은 오늘날 동대문 시장의 뿌리이기도 하며 한국 여성사에 빛나는 업적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동대문은1905년 7월 5일 대한제국 (고종 42년)때에 한성부 개설허가를 받아 탄생한 국내 최초 근대식 시장이었으며, 명칭은 광장주식회사 라고 했다. 그 당시 거금 10만원을 출자한 설립자는 모두 4명이 였으며, 그들은 고종의 비서 실장 격인 김조한, 국내성대신 이봉래, 두산 그룹을 설립한 박승직, 거상 홍총현이였다. 이곳은 원래 미나리 밭이 였는데, 뚝섬에서 모래흙을 퍼와 터를 닦고 건물을 세웠다. 당시 시장건물은 지금 청계천5가 양쪽에 행랑을 짓고 두 건물 사이에 상가를 세웠다. 그리고 최초의 고무신이 등장하고 양동이 빨래비누 가루치약 옥양목 따위 생활용품을 팔면서 장안 아낙네들을 끌었다.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가혹한 공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버텨나갔다.
1950 년 한국전쟁 잿더미로 변해버린 동대문 시장은 피난에서 돌아온 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시작하면서 점차 발전해간다. 이들이 사고 파는 물건이래야 고작 헌 옷가지나 가재도구 정도를 서로 맞바꾸는 물물 교환 형태 였었다. 1954년 광장 시장을 중심으로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지금의 상권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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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2.01
  • 저작시기2004.02
  • 파일형식워드(doc)
  • 자료번호#2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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