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명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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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진(진) 나라

2.한(한) 나라

3.분열과 통일 : 호족과의 교섭

4.삼국시대

5.서진시대

6.동진.오호 십륙국 시대의 개괄

7.남북조시대

8.귀족사회(귀족사회)의 발전과 호한체제(호한체제)

9.당송시대 정치 : 황제, 귀족, 관료

10.당(당) 나라

11.송(송) 나라

본문내용

있다. 당나라 말기부터 한나라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이른바 고문부흥운동이 고개를 들었으나 그 세력은 아직 미미하였다. 그러나 북송 중기부터 구양 수(歐陽修) 등이 고문부흥운동을 다시 제창하면서 이 운동은 사대부들의 동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문단의 큰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유학(儒學)은 주자학(朱子學)으로 대표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의 사상부흥운동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까지의 유학은 훈고학(訓學)이 주류를 이루어 경전(經典)의 자구(字句) 해석에만 천착하는 학문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유교는 정작 민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히려 불교보다 열세에 놓인 느낌마저 있었다. 그와 같이 민중과 유리되었던 유교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자극을 받고 고대의 원시유교(原始儒敎)로 되돌아가 성현(聖賢)의 정신을 올바로 파악하려는 새로운 기운이 싹텄다. 그리고 이것이 곧, 주자학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복고풍조는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개화되었으며 취미분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당나라 이전의 중세기에는 정원을 꾸밀 때에도 정원석(庭園石)에 채색을 하는 등 인공미(人工美)를 극도로 살린 화려한 조경(造景)이 환영을 받았으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원시적인 자연경관을 살린 정원을 매력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와 같은 풍조와 아울러 사대부의 생활 주변에도 고품(古品)을 아끼고 사랑하는 복고취미가 크게 유행하였다. 고동기(古銅器) 같은 것이 발굴되면 사대부들은 그것을 서재에 장식하고 감상하는 것을 하나의 취미로 삼았다. 송나라 때 편찬된 《고고도(考古圖)》 《박고도(博古圖)》 등은 모두 고동기 발굴품을 수록한 책들로서, 학문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당초의 편찬 동기는 취미생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취미생활뿐만 아니라 의학분야에도 복고 또는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풍조가 파급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까지의 양생법(養生法)은 신체에 이상이 생기면 밖으로부터 약을 투입하여 치료하는 대증요법(對症療法)이 채택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온보(溫補)의 방법이 등장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환자의 체내에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줌으로써 질병을 자연 치유케 하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며, 꾸밈이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이다. 송나라 이전의 문화를 그 원인이야 어디 있건 인간 본래의 개성이 몰각(沒却)됨으로써 어떤 한계점에 부닥친 문화라 특징짓는다면, 송나라 문화는 인간의 자각과 더불어 그 개성이 발굴되고 존중되는 풍토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송나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색은 서민문화의 발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화가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향유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정된 계층, 곧 큰 도시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 향상에 따라 발생한 현상이었다. 송대에는 산업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지자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고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읍지인 카이펑[開封]은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와 같은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사대부들의 귀족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는 서민들의 생활이 향상되면서 자연히 서민층에도 확산되었다. 예컨대, 북송의 철종(哲宗) 연간에는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전당포·주점·잡화상 등으로 구성된 시사(詩社)가 있었다. 그들의 시(詩)가 사대부의 시와 견줄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이지만, 송대의 문화가 서민계층에까지 파급되고 시작(詩作)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며, 당나라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송대에는 귀족문화의 서민층에 대한 침투와 아울러, 서민문화가 귀족층에 끼친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도읍에는 구란(勾欄)·와자(瓦子)라는 오락시설이 있어서 잡극(雜劇)·재담(才談)·요술 따위 연희(演戱)가 서민들을 관객으로 하여 번창하였다. 잡극은 뒤에 더욱 발전하여 원곡(元曲)이 되고 사대부들도 그것을 창작하게 된다. 또한 속어(俗語)가 시문(詩文)에 사용되는 경향이 뚜렷해지는데, 이것 역시 서민문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귀족층이나 서민층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송대에 이르러 서적 인쇄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누구나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唐, 宋 변혁기의 변화>
이 시기의 변화로는 제일 큰 변화로 들 수 있는 것은 황제 독재체제가 국가통치체제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귀족을 너무 중시했기 때문에 곧, 귀족들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에 반비례하여 황제의 권한이 약화되었는데,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고 국가의 체제가 확실하게 중앙집권화를 이루어 감에 따라 모든 권력의 핵심에 황제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는 송이 혼란된 상황을 통일하며 당나라이후 각 지방에서 할거하던 절도사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함으로서 권력을 집중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방세력을 억제하고, 건국초기의 여러 제도를 효율적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송은 황제중심의 독재체제를 어느 정도 확립시켰고 이러한 양태는 송을 황제독재체제라고 까지 불리우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이면에는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형태의 모습들이 보이는 것이라 하여 이 시기를 황제 독재체제라고까지 부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입장들도 있다. 그렇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황제의 결정권이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이 시기를 황제독재체제라 부르는 것은 옳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신분제도의 변화를 두 번째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국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사회, 경제적인 변화에 의해서 신분제도가 변화된 것을 국가가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 내용은 양인과 천민으로 구별되는 양천제가 당,송변혁기의 복합적인 사회적 요인에 의해 다시 새로운 기준으로 구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하게된 농업기술의 향상과도 무관치 않은 데, 이는 농업기술의 발달로 빈부의 격차가 점차 커지기 시작함에 따라 조세의 근간이 된 신분제도가 변화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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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04.03.12
  • 저작시기2004.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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