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카노사의 굴욕‘ 배경-
2.‘카노사의 굴욕‘ 내용-
3.‘카노사의 굴욕‘이 독일에 미친 영향-
4.‘카노사의 굴욕‘그 시기(10세기)에 다른 대륙에 일어난 사건
1.) 우리나라에서...
-여진정벌
-거란침입(2.3차)
-팔만대장경
2.) 중국
-왕안석개혁
3.) 유럽
-십자군
2.‘카노사의 굴욕‘ 내용-
3.‘카노사의 굴욕‘이 독일에 미친 영향-
4.‘카노사의 굴욕‘그 시기(10세기)에 다른 대륙에 일어난 사건
1.) 우리나라에서...
-여진정벌
-거란침입(2.3차)
-팔만대장경
2.) 중국
-왕안석개혁
3.) 유럽
-십자군
본문내용
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지 탈환전은 마라의 학살 사건 이상으로 처절하였다고 한다. 전투는 6주일나 계속되고 십자군 병사들은 적의 병사들 외에 주민들까지 가리지 않고 죽였다. 결국 십자군은 성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십자군의 목표를 달성했다.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고 또한 참가한 제후들간에 심한 대립과 반목이 있기는 하였으나 결국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에 기독교 왕국인 예루살렘 왕국이 건설되고 고드프로이가 그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래도 이때가 성지회복이라는 임무가 달성된 유일한 십자군 원정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각국의 국가 형태가 아직 확립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교황의 지휘하에 그처럼 각국의 기사들이 일치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침입을 막을 만한 조직과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 하지만 12세기 접어들면서 이슬람이 반격을 가했다. 유럽의 국왕들, 특히 영국왕 리처드가 중심이 되어 제3차 십자군을 조직하여 예루살렘까지 승리하며 들어갔으나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지독한 폭우로 인하여 이슬람의 명장 살라딘에게 패배하고 돌아갔다. 제2차 및 3차 십자군 원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제1차의 강렬한 신앙심은 온데간데 없이 각자의 이해관계가 앞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4차 십자군 원정때에는 더욱 심한 타락상을 보인다. 십자군 운동은 제4차 십자군의 탈선 사건과 소년 십자군의 참혹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제4차 때부터는 종교적 열정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십자군 원정의 방향을 좌우해서 예루살렘의 탈환보다는 다른 엉뚱한 지역을 공격하곤 했다. 제5차 십자군은 이슬람의 근거지인 이집트를 공격하여 한 때 나일강변의 요새 다미엣타를 점령하였으나 때마침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제6차 십자군은 독일황제 프리드리히의 지휘로 협상을 통해 1229년에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하였으나 곧 칭기즈칸에게 쫓긴 투르크인에게 다시 빼앗겼다. 마지막 두 번에 걸친 7차와 8차 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왕에 의해서 시도되었으나 오히려 자신이 포로가 되어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고 풀려 나는 등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1291년 크리스트교도들의 마지막 보루 아크레가 함락되자 마침내 십자군 운동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일반 신도들은 더 이상 신이나 성직자들을 절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으며 차츰 신앙도 식어갔다. 더욱이 원정 도중에 나타난 교황 권위의 하락으로 인해 교회의 위신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과 기사들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영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후와 기사들의 수입원은 줄어들고 더욱이 전쟁참가 비용을 조달하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자가 많았다. 그와 반대로 눈에 띠게 세력이 강해진 것은 도시의 시민과 국왕이었다. 그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왕권은 몰라보게 강해졌다.
전쟁의 결과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일반 신도들은 더 이상 신이나 성직자들을 절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으며 차츰 신앙도 식어갔다. 더욱이 원정 도중에 나타난 교황 권위의 하락으로 인해 교회의 위신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던 것이다. 또한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과 기사들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영지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후와 기사들의 수입원은 줄어들고 더욱이 전쟁참가 비용을 조달하느라고 가산을 탕진한 자가 많았다. 그와 반대로 눈에 띠게 세력이 강해진 것은 도시의 시민과 국왕이었다. 그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의 왕권은 몰라보게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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