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붓다의 어원적 접근
(2)불교의 중심사상
(3) 네 가지의 진리
(4) 소승불교 대승불교
(5) 선불교
(6)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
(7) 인도교와의 새로운 접근
(2)불교의 중심사상
(3) 네 가지의 진리
(4) 소승불교 대승불교
(5) 선불교
(6)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
(7) 인도교와의 새로운 접근
본문내용
하고 완전한 이상을 현실 안으로 인도해 들이므로 '사도리'의 경험을 일상생활 속에서 체험 하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상의 사소한 의무들까지도 영원무궁한 존재와 다름없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선불교의 목적인 바이다.
· 선불교가 원하는 완전한 상태
느낌과 생활이 다같이 상쾌해질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생의 상쾌함을 깨닫는 데서 타인과 자기의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타인의 행복이 마치 자기 자신의 행복과도 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자기 하나만을 위해 소유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즐기는 마음이다. 선불교는 또한 개인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 하지 않는다. 도리어 새로운 가치관을 주어 세상에 속하게 한다. 그들이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충분한 기쁨이다. 상호의존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서로 필요한 활력인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의 이원론도 초월해야 한다. 그런 구별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무궁한 과거에 살다가 무궁한 미래에 살 것이다. 이 순간에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그것은 즐겁고 빛나는 순수한 생명이다.
(6)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
불교의 각각 다른 종파들의 공통된 특징은 '인생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생은 상식의 강변, 욕망과 무식과 죽음의 구속을 받으면서 아직 각성에 이르지 못한 강변으로부터 구원과 지혜의 강변으로 건너가는 일인데, 각 종파가 달리 나누어지는 이유는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나룻배가 어떤 종류인가 하는 사소한 문제에서 견해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룻배란 불교의 각 도리를 말한다. 즉, 어떤 가르침으로 인해 열반에 이르느냐가 다른 것이다.
실제로 강을 건널 때 나룻배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이고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도 수단이므로 목적(열반)에 이른 후에는 수단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의 세계에서 살아갈 때에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삶과 죽음, 낮과 밤의 대조 가 뚜렷해 보이지만 열반에 이르게 되면 그런 구별은 사라져 버리고 신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즉, 정신적으로 강을 건너선 불교인 마음속의 세계는 열반에 이르기 전의 세계와 동일해지고 비로소 인간은 깊은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7) 인도교와의 새로운 접근
휴스턴 스미스는 극동아시아로 널리 퍼진 불교가 제 고장인 인도에서는 성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불교는 인도교에 침투해 인도교와 혼합되어 있었다. 기원 1000년까지는 인도의 불교도 활발했었지만 그 후 1500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도교와 불교의 차이가 점차 흐려졌다. 불교가 인도교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인도교의 개혁 등을 통해서 두 종교의 거리가 단축되어진 것이다. 오늘날 인도교의 사상 중에서 불교가 주장하는 사상과 공통된 요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고, 불교가 주장하는 교리의 대부분을 인도교가 지지하며 따르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러한 휴스턴 스미스의 주장도 인도 안에서 수행하면서 vipassana
현상관찰 수행법으로서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법이다. 절대 인위적인 의도를 담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들의 것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볼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의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적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지금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교는 사실은 인도교라는 것이다. 사실 붓다는 결코 지금의 대승불교나 소승불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을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극단에 치닫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붓다는 윤회라는 것조차도 결코 언급한 적이 없음을 지적한다. 전혀 근거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실 붓다의 경이라고 말하는 것의 집약시기가 사실은 붓다의 사후 몇 백 년이 지난 것들이며 그것들 또한 처음부터 글이나 문자화된 것이 아닌 붓다의 제자들이 들었거나 외우거나 깨달은 것을 확인하는 작업 후에 그것들로 이루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붓다 자신이 남겨놓았던 기록은 전혀 없으며 모든 것들은 제자들의 순수한 깨달음의 흔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 2002년 2학기 불교철학수업 필기자료
[불교의 이해] 대원정사 ; 정승석 지음 1989
[붓다와 다르마] 민족사 ; 박희준 · 김기은 역. 1991
[불교학 개론 강의실 2] ; 장희옥 1994
[세계의 종교들] ; 휴스턴 스미스 1973
· 선불교가 원하는 완전한 상태
느낌과 생활이 다같이 상쾌해질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생의 상쾌함을 깨닫는 데서 타인과 자기의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타인의 행복이 마치 자기 자신의 행복과도 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자기 하나만을 위해 소유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즐기는 마음이다. 선불교는 또한 개인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분리 하지 않는다. 도리어 새로운 가치관을 주어 세상에 속하게 한다. 그들이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충분한 기쁨이다. 상호의존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서로 필요한 활력인 것이다. 또한 삶과 죽음의 이원론도 초월해야 한다. 그런 구별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무궁한 과거에 살다가 무궁한 미래에 살 것이다. 이 순간에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그것은 즐겁고 빛나는 순수한 생명이다.
(6)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
불교의 각각 다른 종파들의 공통된 특징은 '인생은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생은 상식의 강변, 욕망과 무식과 죽음의 구속을 받으면서 아직 각성에 이르지 못한 강변으로부터 구원과 지혜의 강변으로 건너가는 일인데, 각 종파가 달리 나누어지는 이유는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나룻배가 어떤 종류인가 하는 사소한 문제에서 견해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룻배란 불교의 각 도리를 말한다. 즉, 어떤 가르침으로 인해 열반에 이르느냐가 다른 것이다.
실제로 강을 건널 때 나룻배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이고 수단에 불과한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도 수단이므로 목적(열반)에 이른 후에는 수단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의 세계에서 살아갈 때에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삶과 죽음, 낮과 밤의 대조 가 뚜렷해 보이지만 열반에 이르게 되면 그런 구별은 사라져 버리고 신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즉, 정신적으로 강을 건너선 불교인 마음속의 세계는 열반에 이르기 전의 세계와 동일해지고 비로소 인간은 깊은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7) 인도교와의 새로운 접근
휴스턴 스미스는 극동아시아로 널리 퍼진 불교가 제 고장인 인도에서는 성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불교는 인도교에 침투해 인도교와 혼합되어 있었다. 기원 1000년까지는 인도의 불교도 활발했었지만 그 후 1500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도교와 불교의 차이가 점차 흐려졌다. 불교가 인도교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인도교의 개혁 등을 통해서 두 종교의 거리가 단축되어진 것이다. 오늘날 인도교의 사상 중에서 불교가 주장하는 사상과 공통된 요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고, 불교가 주장하는 교리의 대부분을 인도교가 지지하며 따르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러한 휴스턴 스미스의 주장도 인도 안에서 수행하면서 vipassana
현상관찰 수행법으로서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는 수행법이다. 절대 인위적인 의도를 담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들의 것 그대로 바라봐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볼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의 실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지적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지금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교는 사실은 인도교라는 것이다. 사실 붓다는 결코 지금의 대승불교나 소승불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을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극단에 치닫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붓다는 윤회라는 것조차도 결코 언급한 적이 없음을 지적한다. 전혀 근거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실 붓다의 경이라고 말하는 것의 집약시기가 사실은 붓다의 사후 몇 백 년이 지난 것들이며 그것들 또한 처음부터 글이나 문자화된 것이 아닌 붓다의 제자들이 들었거나 외우거나 깨달은 것을 확인하는 작업 후에 그것들로 이루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붓다 자신이 남겨놓았던 기록은 전혀 없으며 모든 것들은 제자들의 순수한 깨달음의 흔적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 2002년 2학기 불교철학수업 필기자료
[불교의 이해] 대원정사 ; 정승석 지음 1989
[붓다와 다르마] 민족사 ; 박희준 · 김기은 역. 1991
[불교학 개론 강의실 2] ; 장희옥 1994
[세계의 종교들] ; 휴스턴 스미스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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