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혁의 모색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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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지배층의 개혁론
1) 토지 문제
2) 조세 문제
3) 상업 문제

3. 농민층의 개혁론
1) 토지 문제
2) 삼정 문제
3) 상업 문제

4. 맺음말

본문내용

기 때문이다. 일부도시노동자들은 미가앙등으로 인한 극심한 생계의 압박을 받아야만 하였다. 또 일본상인들의 미곡수집으로 장시에 곡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 상황까지 나타났으며, 일부농민들은 미곡유출로 말미암아 종량도 준비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원호, 1991 <곡물의 대일유출과 농민층의 저항> 《1894년 농민전쟁연구 1》pp.271~273
그러나 개화파정부는 외국 상인들의 상권침투와 외국 상인들의 미곡수출에 의한 미가앙등을 막을 이렇다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화파정부가 취한 시전상인과 개항장 객주의 특권철폐조치는 결과적으로 외국상인들의 상권침투를 더 용이하게 해주었다. 또 지방관의 방곡령 금지 지시도 미곡유출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화파정부는 전근대적 상업구조를 위한 개혁을 취하면서 외국 상인들의 상권침투로부터 국내 상인들을 보호할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진상, 1992 《갑오농민전쟁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농민군의 역사정 지향과 전쟁의 결과를 중심으로》서울대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p.59
4. 맺음말
개화파가 실시한 부르주아적 제도 도입은 봉건장벽을 철폐하여 실제로 일본의 조선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물리력에 의거하여 정권을 잡고 개혁을 추진한 그들로써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반외세 저항주체인 민중세력과 연합할 수 없었다. 당시 봉건적 토지소유 제도와 농민에 대한 봉건적 착취의 청산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농민보다는 지주의 입장을 옹호함으로써 농민들의 반봉건적 개혁역량과 결합하지 못하는 계급적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 자유무역주의의 폐해나,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본주의 건설을 도모하여, 결국 외래자본의 침투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민들의 경제적 지향은 무엇보다도 조세수취제도인 삼정을 바로잡는데 있었다. 삼정의 개혁에 관한 농민들의 요구는 집권층과 지방관리의 제도적 또는 불법적인 조세수탈을 중지하라는 것에 집중되었다. 말하자면 당시대의 경제적 모순을 총체적으로 철폐하여 가혹한 수탈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절박한 요구였다.
그러나 이는 모순되고 문란했던 조세 수취제도에 대한 시정을 바란 것이지,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요구를 가지고 농민군이 기존의 경제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했다고는 할 수없다. 이는 근대적 조세제도에 대한 안목이 없었던 현실에서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이같이 살피면 정부지배층의 개혁정책과 농민층의 개혁방안은 어느것이나 이 시기의 사회모순, 농업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그 내용, 성격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고 하겠다. 전자가 지주제·지주적 상품생산을 바탕으로 농촌경제를 안정시키고 근대화시키려는 것이었음에 대하여, 후자는 지주제를 해체시키는 가운데 농민경제·농민적 상품생산의 안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양자는 신분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은 1894년의 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의 상반된 두 개혁운동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다.

키워드

경제,   토지,   상업,   조세,   농민,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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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4.04.02
  • 저작시기2004.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5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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