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와 중세의 역사편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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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 론

2. 총 설

3. 고대의 역사인식

4. 중세의 역사의식과 역사서술

본문내용

의 단일성에 대한 자각은 이승휴가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치적 감각에서도 두 사서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즉 삼국유사는 신라 제왕들의 행적과 교종 계통의 신라불교를 중점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무신집권시대에서 원(元)간섭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고구려계승의식을 신라계승의식으로 바꾸고, 나아가 무신집권기에 소외되었던 구(舊)신라계 인사들이 중앙진출을 촉진하려는 의도가 은연중 잠재된 것으로 보이낟. 이에 비해 제왕운기는 삼국을 균등하게 포용하는 대조선주의(大朝鮮主義)를 지향하면서도 고조선, 삼한, 3국,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큰 흐름을 역대 왕조의 제왕의 위대한 창업과 군신의 합력에 의해 이끌려진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그러나 일연과 이승휴가 비록 불교나 도가와 같은 종교의 신앙심이 큰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미 성리학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되고 유학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시대환경에서 살았던만큼 그들의 역사서술 태도는 유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사기는 위에서 말한 단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료임에 틀림없다. 삼국사기는 국가에서 편찬한 역사서로서 국가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국가사 전반을 다룬 역사서이고 중세 동양의 역사서 체제인 기전체로 편찬되어 왕과 국가의 큰 일에 관한 기록은 본기(本紀)에, 제도에 관한 내용은 지(志)에, 개인에 관한 기록은 열전(列傳)으로 나누어 실었고 이에 연표를 붙였다.
삼국사기의 성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원전에 대한 이해와 편찬배경, 편찬목적 드엥 대한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삼국사기의 기본원전은 고려초 광종조에 편찬된 삼국사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이다. 그 위에 신라측의 자료를 더 보완했을 것이고, 금석문 자료도 보충했으며 가야음악기사가 보완되고 그 위에 중국측 자료를 보완했음을 찾아낼 수 있지만, 사료 수집에 대한 열의가 빈약하였던 것은 사실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의 온갖 문서와 기록들로도 일반 국민들의 사회상, 경제상을 알아볼 수 있었을 테지만 자료 수집의 빈곤은 결국 지배권력층의 역사만 담아내고 말았다는 한계점을 드러낸다. 당시만 해도 자료를 수집하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오늘날보다는 훨씬 중요한 자료를 많이 수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삼국사기의 편찬배경으로 몇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예종 인종조에 문한정책(文翰政策)이 활발히 추진되고 송나라 문화가 다량으로 들어오면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왕에게 올린 '진삼국사기표'에서 왕의 말로 언급한 "당시 우리나라 학사대부들이 중국의 경전과 역사에 대하여는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는 망연히 모른다"라고 한 것은 왕의 생각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점이 바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된 하나의 동기였고 배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배경은 당시 송나라 문화의 수용으로 인하여 문체가 사륙병려문체(四六騈驪文體)에서 고문체(古文體)로 바뀌어 가는 시점이었는데, 김부식은 바로 고문체 운동을 벌였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고문체는 문장을 간결하고 논리적으로 쓰는 특징을 가졌다. 김부식은 역시 진삼국사기표에서 우리나라의 고기가 문장이 무졸하고 소략하여 정치의 교훈을 줄 수 없다고 지적한 것을 이를 뜻한다. 김부식이 작성한 열전기사와 사론은 고문장으로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배경은 당시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인하여 귀족 내분이 격화되어 왕조가 위태로운 시기였고 왕조의 존망이 염려되던 시기였다. 특히 그는 묘청난 진압의 책임자로 이를 완전히 진압한 후 공신에 책봉되고 문하시중의 직을 갖기에 이르렀다. 당시 국가는 왕조와 일치하는 것을 생각하였고 사론에서 체(體)의 올바른 실천을 강조한 유학자 김부식의 현실의식이 삼국사기에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배경은 고려의 계승의식이다. 고려는 정신적으로는 고구려를 게승한다고 하였지만 고구려의 문화와 학문적 전통이 250여 년간 두절된 것에 비하면 영토적으로 신라를 계승하였고 신라의 불교, 유교 등의 문화적 전통과 경주 출신 인물들이 중앙정계진출로 인하여 신라적 영향이 강하게 미쳤다.
삼국사기의 편찬목적은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삼국사가 편찬된 고려국초와는 여러 가지 사정이 변화하였고 삼국사가 국내자료만을 중심으로 편찬되어 소략한 점을 보완하고 당시 우리나라 학사대부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삼국사기가 갖는 사학사적인 위치는 한국 중세 사학의 기촐르 마련하여 이후까지 사학계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책이 민족 주체성이 약하다는 문제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중세에는 민족이라는 실체는 있었지만 사회구조적 특징상 신분적 차별성이 너무 강하여 온 국민을 하나의 민족으로 의식하는 점은 극히 미약하였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계기가 되었던 Abbe. Sieyes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작은 팜플릿의 내용이 생각난다. 그는 자문에 대한 대답으로 제3신분, 즉 국민이란 원래 'Everything'인데 현재 'Nothing'이고 우리는 'Something'이 되길 원한다고 하여 대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만약 그 당시 우리에게도 동학혁명과 같은 민족사적인 사건이 있었고,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의 사서와 역사의식은 생각하기에도 벅찬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단일체의식보다 계급의식이 뿌리까지 자리잡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봤을 때 중세에는 민족적인 특징에 대한 강조 보다는 선진 중국문화의 수용을 더욱 중시하는 것이 학문계의 주도적 현상이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는 사학사적 의의를 보더라도 현전하는 최고의 사료이며, 현대사료 이해의 중심이고 기전체를 도입했다는 점. 또 구삼국사보다 발전된 문화의식을 담고 있고 객관성과 사료로서 신빙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큰 위안을 삼아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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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4.05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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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45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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