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조 번영의 가교(架橋), 옹정제 -『옹정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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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조 번영의 가교(架橋), 옹정제 -『옹정제』를 읽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주목받지 못한 탁월한 황제 - 서설

2. 고뇌하는 노황제 - 옹정제의 즉위

3. 개가 되고 돼지가 되어라 - 새 황제의 자리 굳히기

4. 천명을 받들어 - 옹정제의 치세

5.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 옹정제의 민족 융화 정책

6. 청조 번영의 가교 - 결론

본문내용

하게 대응하는 소수 민족들에게는 가차 없이 정복의 말발굽을 보여주었다. 이미 강희제 시대에 한 번 혼이 난적이 있는 준가르부(지금의 신장성 부근)를 정복하여 영구적으로 청의 영토로 복속 시켰고, 사천성 부근에 살고 있는 타이와 베트남 지방 소수민족인 먀오족을 정벌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건륭제 때를 정점으로 하여 청나라가 최대 영토를 가질 수 있게끔 그 토대를 닦아 놓은 것도 바로 옹정제였다.
6. 청조 번영의 가교 - 결론
만주족이 한족을 다스린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기틀을 다진 강희제와 그의 넷째 아들 옹정제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강희제는 관대한 정치를 편 인간적인 군주인 반면 옹정제는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였다. 『강희제』를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통치를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강희제는 병자호란 25년 후인 1661년 만7세 때 즉위해 무려 61년 동안 국경을 넓히고 인두세를 동결하는 등 화려한 업적을 쌓은 덕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티베트를 병합하여, 오늘날의 중국 지도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1712년 백성들의 세금을 영원히 동결한 성세자생정을 발표, 선정을 베푼 인자한 군주였다.
다만 강희제에게는 자식 문제만이 골칫거리였을 뿐이었다. 자녀 56명 중 절반이 성인이 되기 전에 숨졌고, 유일한 적자인 둘째를 2세 때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관료들에게 둘러싸여 정치보스로 크면서 안하무인이 되는 바람에 두 차례나 폐위시켜야 했다.
이에 비해 강희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옹정제는 초인적인 근면과 대쪽같은 개혁의지로 국사를 돌봤던 군주였다. 옹정제는 45세 때 제위에 올라 13년 동안 새벽4시부터 밤12시까지 일하며 초인적인 정력으로 의지를 펴나갔다. 백성들의 고통 위에서 관료들이 명성과 실익을 동시에 누리는 보스정치와 부정부패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영향력이 큰 정치보스들을 제거하고 새 인재들을 발탁했다. 밀정을 통해 관료들을 감시하며, 관료들과 천자가 직접 의견을 주고받는 주접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매일 수 십 통을 읽고 답장을 써야 했다. 신하의 알현 신청은 거절하고 편지를 쓰도록 했다.
강희제는 먼 곳까지 원정과 사냥을 즐겼으나 옹정제는 하루만 쉬어도 일이 밀리기 때문에 베이징 밖으로 나가볼 여유가 없었다. 지방관들에게 근무지 수당인 양렴은(養廉銀)을 주되 그 외에는 한 푼도 취하지 못하도록 했다.
여론이란 유력자들의 이익 대변에 불과하다며, 명령을 내릴 때 도리에 맞는 지만을 생각했다. 황태자도 일찍 책봉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일을 황제 혼자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방식은 옹정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런 그가 붕어하자 관대한 정치가 되살아났지만, 그의 개혁 덕택에 청조는 건륭제 이후 여러 명군을 맞이하여 100년 이상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글쓴이는 이런 옹정제를 청나라의 어용 가마에서 나온 백자 도자기에 비유했다. 매끄러운 순백의 표면 위에 다섯 가지 채색의 화조와 문양을 그려 넣되, 한 획도 소홀한 데가 없고 점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참으로 어울리는 비유이다. 이처럼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에게서 물려받은 부흥의 물결을 온전히 되살려 어느 한 곳에 치중하지 않고 아들인 건륭제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강희제 시대가 너무 길어서 매너리즘에 빠진 관리들에게는 그 느슨한 끈을 바싹 조여 주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삼대(三代) 황제 중 맨 마지막인 건륭제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청나라의 초기 전성기가 완성되게끔 한 것이다. 이렇게 짧으면서도 역사에 굵은 획을 남기고 간 옹정제는 실로 청조 번영의 가교(架橋)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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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8페이지
  • 등록일2004.04.07
  • 저작시기2004.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5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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