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조경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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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나라 전통조경양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우리나라의 전통조경양식

2. 한국정원의 특성

3. 한국의 전통정원의 종류
1) 신림
2) 민가
3) 궁궐의 조경
(1) 백제의 궁원
(2) 고구려 안학궁 터
(3) 신라의 동궁 원지
(4) 통일신라의 궁원
(5) 고려의 궁터
(6) 조선의 궁원
① 정궁 경복궁 ② 이궁 창덕궁 ③창경궁
4) 서원과 별서의 조경
(1) 서원의 조경
(2) 별서의 조경
5) 누원

4. 우리나라 전통조경의 구성 요소
1) 굴뚝
2) 담장
3) 다리
4) 연못
5) 화목

5. 맺음말

본문내용

,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주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 강녕전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쓰게된 뒤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70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 돈화문(보물 제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원래는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이 있었고 그 위에 이층으로 세운 중문이었다. 이런 양식은 옛날 삼국시대로부터 궁궐의 정문으로 채택되어 왔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으로, 홍예문이 셋이 열린 육축(陸築)위에 올려 세운 구조이다. 돈화문과는 그 모습이 완연히 다르다. 창덕궁의 모든 구성은 이궁(離宮)으로서의 조촐한 맛을 지니고 있다. 돈화문은 그런 구조를 대표한다. 창덕궁과 더불어 돈화문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복구된 것은 선조 40년(1607)이었다. 조선 궁궐에 현존하는 중문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2. 금천교
조선왕궁에는 북(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명당수가 있고 궁의 정문에서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이 명당수 위에 놓여진 돌다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경복궁의 영제교며 창경궁의 옥천교와 덕수궁과 경희궁에도 있었던 그런 다리가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 태종 11년(1411)에 조성되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다리의 구조를 보면 하천 바닥에 깔린 기반석 위로 홍예 2틀을 만들고 멍엣돌위에 돌난간을 세우고 다리 윗부분은 장대석으로 깔았다. 중앙부의 홍예 기반석 남쪽 면에는 해태상을, 북쪽에는 거북상을 설치하였다. 이들 상 뒤로 홍예틀이 만나는 기석에 귀면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위 양쪽에는 돌로 난간을 돌렸는데, 주석이 서고 그 사이에 동자석이 설치되고 한판 돌로 만든 풍혈이 끼어 있다. 이 다리는 평면이 아니라 중앙이 들린 구릉형이다. 이 다리 앞에 명당수와 관련되는 궁의 외당문인 진선문이 있다. 돈화문내원에 회화나무의 수림이 울창한데, 이는 고대부터 궁문내정에 정승나무를 심는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궁의 별칭을 괴신(槐宸)이라고도 한다.
3. 낙선재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곳으로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 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4. 부용지
부용지는 장방형 연못으로 못 가운데에는 직경 9미터의 원형 섬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숙종 때부터 연못이 있었으며, 1707년 지금의 부용정 터에 택수제가 건립되었던 것을 1792년에 정조가 택수제를 헐고 부용정을 개건한 것이다. 부용정 옆에는 석분위에 아름다운 괴석(怪石)이 심어져 선산을 상징하고 있다. 부용지에는 수련(睡蓮)이 심어져 있고 북쪽의 주합루와 동쪽의 영화당, 남쪽의 부용정이 수면에 오색아롱진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수놓인다. 부용지의 수원(水源)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며, 비가 올 때는 서쪽 계곡의 물이 용두의 입을 통하여 입수하게 되어 있다. 못 속에는 잉어나 붕어 등의 물고기를 길러 임금이 낚시나 뱃놀이를 했던 곳이다. 동남쪽 호안(護岸)에는 이채롭게 물고기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5. 주합지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주합루가 완성된다. 실학의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에 정조는 등극하여 유능한 문신들과 더불어 문치에 노력한다. 임금 자신이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 주합루를 짓고 아래층을 규장각이라하여 수만 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여기에서 나라에 진출할 동량들을 육성시켰다. 또한 주합루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영화당에서 취재된 인재들 양성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주합루 남쪽에 어수문을 짓고 그 앞에 방지(부용지)를 팠다. 방지의 중앙엔 당주(當洲)를 만들고 잘 생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에 당주가 있어야 재록(財祿)을 누린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방지의 서편엔 누각이 있고 지변(池邊)에 입수하는 물을 토하는 이무기 머리상이 있다. 동쪽엔 영화당이, 남쪽엔 부용정이 있다.
6. 애련지(애련정)
주합루 후원으로 해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층층다리를 딛고서면 건너편에 방지(方池)가 있고 그 북쪽에 단문의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애련정이다. 애련정에 들어가 앉으면 난간위로 기둥에 장식한 낙양각이 드리워지는데, 마치 그림틀의 액자 같아서 앉아서 내다보는 경치가 한폭의
그림 같다. 철따라 변하는 기막힌 경관
을 여기에서 즐길 수 있다. 연못에 물을
담기 위하여 입수시키는 부분의 석조는
아주 단조로우나 재기(才氣)가 넘친다.
7. 향나무
이 향나무는 나이가 약 700년
으로 추정되는 노목(老木)이며,
나무 높이가 6m 정도 되고 가슴
높이 둘레가 4.3m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줄기가 용틀임하는
것 같은 진기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특이하다.
8. 굴뚝 9. 괴석
10.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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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10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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