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숨결을 찾아서-부제 : 나의 경주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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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목표

Ⅱ. 답사 코스

Ⅲ. 들어가며

Ⅳ. 삼국유사와의 연관성
제 1코스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김유신(金庾信) 장군 묘
제 2코스 분황사(芬皇寺)―계림(鷄林)―대릉원(大陵園 : 미추왕릉, 천마총)―첨성대(瞻星臺)
제 3코스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 :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안압지(雁鴨池)―포석정(鮑石亭)
제 4코스 황룡사지(皇龍寺址)―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진평왕릉(眞平王陵)
제 5코스 불국사(佛國寺)―석불사(石佛寺)의 석굴암(石窟庵)

Ⅴ. 마치며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살 만한 자리인지라 곧 내려가 알아보았더니 이는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그는 곧 꾀를 써서 남몰래 그 집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는 이튿날 아침에 그 집 문앞에 와서 말하기를, "이 집은 우리 할아버지적 집이다"라고 하니 호공은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시비를 따지다가 결판을 못 내고 결국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리가 말하기를, "무슨 증거가 있기에 이것을 너희 집이라고 하느냐?"하니 그 아이가 대답하기를,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지방으로 나간 동안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여기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사실을 밝혀주소서"하여 그 말대로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곧 빼앗아 살았다.
이때에 남해왕이 탈해가 지혜 있는 사람인 줄을 알고 맏공주로써 아내를 삼게하였다. 남해왕의 뒤를 이은 유리왕(또는 노례왕)이 죽자 이 탈해가 바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이것이 옛날(昔) 우리 집이요"하면서 남의 집을 빼앗았다고 하여 성을 옛 석(昔)자로 하였다. 혹은 까치 때문에 궤짝을 열었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를 떼어버리고 석씨로 하였다기도 하며 궤짝을 풀고(解) 알을 벗고(脫)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였다고도 한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부름하는 자를 시켜 물을 구하여 마시는데 심부름 하는 자가 물을 길어서 오던 중에 먼저 마시고 드리려 하니 물그릇이 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심부름 하던 자가 두려워 맹세하여 말하기를, "다음에는 가깝고 멀고 간에 감히 먼저 물을 마시지 않겠소이다"하니 그제야 그만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는 심부름 하는 자가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도 토함산에 이 우물이 있는데 옛사람들이 요내우물(遙乃井, 혹은 예내우물이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신라 문화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통일 신라 중엽에 이 우물위에 석불사(石佛寺)가 지어지고 이 샘물 위에 자비로운 부처(석굴암 본존불을 뜻함)가 앉았다. 현재 석굴암 밑에 있는 돌 물통에 고여있는 물이 이 요내우물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고 한다.
관련설화 : <대성이 두 세상 부모에게 효도하다>
<그림 >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가 서려있는 석가탑(무영탑)
설화를 알고 보니 더욱 애틋하다.
석가탑을 만들 당시에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인 백제인 아사달을 불러 탑을 만들게 했는데 아사달이 탑에 온갖 정성을 들이고 있는 동안 시간이 몇 해 흘러 고국에 있는 그의 아내인 아사녀가 남편을 그리워하여 불국사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탑을 완성하기 전까지 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절 밖에서 남편을 애절히 기다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사녀를 보고 스님이 아사녀에게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는데 거기서 지성을 들인다면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요."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아사녀는 공사가 끝나기를 빌었고 그림자가 떠오를 것을 빌었다. 그런데 공사가 끝이 나도 탑의 그림자는 끝내 연못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력마저 없어 남편의 이름을 부르다가 연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후 탑을 완성시킨 아사달은 바로 연못으로 달려갔으나 아사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는데 홀연히 아내의 모습이 앞산에 나타나 바위에 겹쳐졌다. 이 모습이 부처님의 모습처럼 보여지기도 했는데, 그 후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고 고향으로 유유히 사라진 후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불국사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 2km를 따라 가면 영지라는 연못이 있는데 오랜 세월 풍우로 얼굴모습이 거의 마멸된 아사달이 조각했다고 전하는 석불의 좌상이 있다.
2. 석불사의 석굴암(국보 제 24호-경주 진현동)
<그림 >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 석불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문화와 과학의 힘,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이며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이다. 석굴암은 경덕왕10년(751)에 착공하였으며 김대성이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공사를 맡아 완성시켰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뉘어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돼 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축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추어 하나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Ⅴ. 마치며
답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드는 일인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몸소 겪어 보니 그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기실 하루만에 신라 천년의 고도인 경주를 답사한다는 자체가 무리한 계획이었지만, 적을 서울에 두고 있는지라 어쩔수 없이 피상적인 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쉽다. 제대로 공부를 더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못내 남는 답사였다 비록 이번에는 피상적인 답사에 그쳤지만 다음번에는 꼭 제대로 된 답사를 하리라 다짐해본다.
Ⅵ. 참고문헌
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편(석불사 편), 유홍준, 창작과 비평사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편(불국사 편), 유홍준, 창작과 비평사
3.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일연, 리상호 옮김, 강운구 사진, 까치글방
4. 목수 신영훈과 함께 하는 우리문화 우리역사 답사기, 신영훈, 사진 김대벽, 대한교과서
5. http://www.gyeongju.gyeongbuk.kr/kr/main/frame.asp
6. http://www.toursilla.co.kr/MAIN-K/DEFAULT.htm
7. http://www.gcp.go.kr/
8. http://pohang.kbskorea.net/gyeongju/inside/story01.htm
9. http://www.kyongbuktour.or.kr/kyoungju/korean/kb3.html
10. http://www.contest.co.kr/~hanguk/sukgula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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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OCU,   경주,   신라,   답사기,   기행문,   견학문,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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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16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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