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하우스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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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바우하우스와 디자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2. 바우하우스 선언문

3.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

4.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5. 바우하우스의 구성원

6. BAUHAUS의 역사적 배경에 관하여

7. 바우하우스 이전의 사회배경

8. 바우하우스의 목적

9. 바우하우스의 프로그램

본문내용

와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공개적인 대립을 보인다. 논쟁의 바탕은 산업을 위한 제품 모델의 표준화 문제였다.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기능주의에 의해 더욱 확실해진 취향과 뚜렷해진 어떤 스타일의 대중화 가능성을 보면서 표준화를 권장한다. 그에 반해서 헨리 반 데 벨데는 미술가는 어떠한 ‘규칙’에도 복종할 수 없으며, 미술가는 천성적인 개인주의자라고 대꾸한다. ‘본능적으로 미술가는 그의 활동을 메마르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조합’의 외적인 이미지는 헤르만 무테지우스의 견해에 더 많이 부합된다.
*피터 베렌스
윌리엄 모리스에 의해 일어난 응용미술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의 직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가이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알려졌던 그는 뮌헨에서 영국의 ‘길드’ 형식을 본뜬 수공업미술을 위한 아틀리에의 설립에 참여했다. 세기초에 그는 미술과 수공업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 다름슈타트의 미술가 집단을 ‘총체예술작품’의 찬양정신 속에 결합시켰다. 그리고 뒤셀도르프 공예학교장인 그는 아르누보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는 유리나 강철과 같은 재료의 표현능력을 발견하면서 산업건축 방향으로 나아간다.
1914년 이전에 베를린에서 현대건축의 훌륭한 대표자가 되도록 운명지워진 세 젊은이가 일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진 곳이 바로 피터 베렌스의 아틀리에였다. 르 꼬르뷔지에는 1910년에 다섯달 동안 그곳에서 일했고, 발터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08년에서 1910년사이에 거기서 서로 만나게 된다. 1923년에 이르러서야 교신을 하게 되는 르 꼬르뷔지에와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 시기에 알게 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의 바우하우스의 두 지도자는 벌써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8. 바우하우스의 목적
바우하우스는 사실 건물을 짓는다는 의미에서 그를 단순한 건축가로 보는 오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건축은 공간의 지배를 내포하고 있고, 그는 공간에다 형태를 구상할 수 있는 전권자로서의 의무를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일상적인 사용도구에서부터 도시 전체까지 볼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지배하는 건축을 언제나 꿈꾸었다고 1965년 함부르크에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형태의 창조가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모든 시각적인 표현방법의 고찰을 통해 ‘형태의 과학’을 구성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오직 한 미술가만이 형태를 생각해내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10년부터의 자신의 활동과 1912년부터의 ‘공업조합’참여로 인해서 기술과 산업의 힘이 우세하게 되는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의 어려움을 자각하게 된다. 단 윌리엄 모리스의 경험, 헨리 반 데 벨데, 피터 베렌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미술가들을 생산의 세계에 연결시켜 주는 첫 번째 길을 열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구상한 학교는 정말로 지적인 작업과 수공업적인 작업사이, 형태의 법칙에 관한 인식과 재료의 적절한 사용 사이의 관련 위에 세워져 있다. 더구나 그의 계획은 현재 속에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것이다. 그리고 미래적인 것은 희귀하고 유일한 물건, 돈많은 손님에게 예약된 사치품이 아니다. 모두의 가까이에 있는 일상용품인 것이다. 공업생산의 조건에도 합당하고 심미적인 품질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물건이어야 한다.
현대적인 의미의 연구소에서 그들은 형태의 계획에서부터 제작 가능성의 분석, 재료의 실험 등 그들의 요구에 관한 답변과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프리츠 막켄젠은 1915년 10월 14일의 한 편지에서 헨리 반 데 벨데를 존중하면서 발터 그로피우스에게 이렇게 알렸다. “공예가들과의 활발한 협력은 분명히 유지되어야 하고, 가능한 한 더욱 합리적인 방법까지도 적용해야 합니다. 이런 시점에서 그 분야는 반 데 벨데의 후임자를 위해 훌륭하게 마련되었습니다.”
9. 바우하우스의 프로그램
발터 그로피우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예산안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수공업과 기업의 풍요화’를 위해 학교를 수공업의 실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존에 있는 장인의 아틀리에와 합동으로 새로운 아틀리에를 열어서 예술의 종목 전체를 재규합하는 작업공동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작업 공동체는 결국 나라의 산업과 수공업체와의 가장 긴밀한 접촉 속에서 건축, 조각, 회화, 실내장식, 응용미술 등 건설에 이르는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919년 4월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네 페이지짜리 팜플렛으로 발표되었다. 그 책자에서 라이오넬 파이닝거의 목판화 뒷장인 두 번째 페이지에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서명한 선언문이 검토중인 ‘노동공동체’의 본질을 명확히 밝혀 말하고 있다. 그 본질은 예술가와 장인들의 연합에, 그들이 따로따로 소속되어 있는 학교들의 융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수공업에 의해 모든 사람들은 차별없이 ‘미래의 새로운 건설’에 협력하게 되어 있다. 이 건설은 존 러스킨과 같은 사람에게 복고주의의 열망인 중세의 대성당이 아니라 미래의 통일이고 인간의 신앙과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공동정신의 산물이다.
이 ‘작업공동체’는 마침내 사회의 핵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수공업적인 기업과의 접촉, 그리고 생산 현장이면서 판매 계약을 체결하는 산업과의 접촉을 통해서 외부로 열려 있다. 내부에서는 연극, 음악회, 강연, 시 낭송회, 가장무도회 등의 공동의 오락이 작업에서의 기분전환이 된다.
이 프로그램은 새로운 것은 이론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세기초 이래로 여기저기서 내세워진 교육개혁안에 있었던 내용이다. 억양까지도 내세워진 교육 개혁안에 있었던 내용이다. 억양까지도 왕정의 몰락 이후 독일에서의 사회적인 격동 속에 새겨져 있다. ‘예술을 위한 노동회의’의 토론은 가령 발터 그로피우스가 단지 그 기안만을 담당했을지라도 그의 말에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한 지면에 펼쳐진 시대의 애매모호한 열망의 일부가 구체화되는 기회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의의는 이러한 산업화의 기능주의의 물결 속에서 수공업, 예술의 나아갈 방향의 새로운 지표를 열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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