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성리학 수용과 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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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후기 성리학 수용과 개혁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공민왕, 신돈의 반원개혁
1. 공민왕 즉위 및 시대배경
2. 신돈의 집권
3. 개혁의 성과와 그 한계

Ⅲ. 정도전, 이색의 개혁론
1. 고려의 성리학 수용
2. 士大夫의 정계진출 과정
3. 田制改革에 의한 新進士大夫의 分岐
4. 온건파와 급진파의 사상적 차이점

Ⅳ. 고려말 개혁의 의의

Ⅴ. 결론

본문내용

정비를 통해 원활한 경제제도로의 복귀라는 성격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교육, 군사, 대외정책의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저력은 역시 국가세수의 확보를 기반으로 시행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전제개혁인데, 이러한 전제개혁은 물론 시대가 갖는 한계를 갖고 출발한 불안전한 개혁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행된 정책의 성격은 토지제도의 왜곡으로 인해 생긴 생산계급의 土地遊離를 방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제도의 전반적인 정비를 꾀한 것이지만, 그 성격은 다분히 보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당시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가를 배제하고 일반민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효과는 있었으나, 개혁의 실시자가 갖고 있는 의도는 민중의 생활수준 향상에 있는 것이 아닌, 왕권강화를 통한 복고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다. 같은 행태가 아래로부터 행해졌다면 다분히 진보적인 행태로 볼 수 있겠으나, 기득권의 배제를 통해 다시금 권력의 강화를 의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정상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당시 개혁의 방안으로는 너무 성급한 실행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돈의 개혁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개혁이 성공한 후에 더욱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권문세가에 의한 金 · 權의 집중을 타파하고 나서의 사회체제 정비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대안과 그 인적자원에 대한 안배가 부족했고, 이에 대한 결과는 개혁의 주도자가 공백으로 남자 이전보다 더한 반동을 불러일으킨 우왕 대의 상황을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은 이후 시대의 주도 계층으로서 사대부를 등장시키는 기폭제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전과의 연속성을 부여해 줄 수 있다. 또한 사대부 주도의 개혁은 공민왕대의 보수적인 성향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색계열 사대부의 성격은 공민왕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급진적인 정도전계열의 사대부가 꾀한 개혁은 사실 약간의 억지를 첨가한다면, 그나마 아래로부터의 개혁으로 평가를 할 수도 있다. 신진사류의 정치적·경제적인 여건이 기득권과는 거리가 있으며, 능력 본위로 정계에 진출했다는 점은 집단자체의 성격에 이전 시대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蔭敍와 座主門生 위주의 전근대적인 집단 구성이 아닌 공적인 관계를 매개로 혹은 그것은 추구하는 집단이었다는 점이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이나 권문세가와는 그 개념부터가 새로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온건파 사대부와도 비교되는 면으로 온건파 사대부의 주류를 이루는 이들은 물론 과거에도 합격하고, 급진파에 뒤지지 않는 주자학적인 소양의 소유자임에는 분명하지만, 蔭敍의 긍정과 座主門生制에 대한 옹호입장이 신법파 사대부에 비해 발전적인 면이 덜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성리학을 보는 관점의 차이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으나, 아무래도 그러한 시각차이는 그들의 출신 계층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하는 추론을 하게 한다. 결국 출신계층에서 좀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될 수밖에 없는 쪽이 개혁의 진보성에서는 더욱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출신계층에만 의지한 평가는 아니다. 출신계층의 차이로부터 연유한 입장의 차이가 연쇄적으로 개혁에서의 입장차이로 일관적으로 이뤄졌기에 가질 수 있는 관점이다.
Ⅴ. 결론
이상 공민왕때부터 시작된 반원개혁 이어 사대부들의 개혁까지 고려말 일련의 모든 개혁과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때 불가사상에 심취해 있던 승려출신 관료나,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나 두 개혁세력이 추구하던 사회는 민이 수탈당하지 않고, 권세가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는 사회를 구성하기 원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개혁과정 역시 서로 다른 각각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상 연속되는 일련의 과정으로서 볼 수 있다.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은 물론 결론상으로 끝맺음 하자면 분명 실패한 개혁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개혁의 시도를 통하여, 신진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 졌고, 이러한 기반을 통하여 다시끔 확인 해 볼 것은 이러한 실패한 개혁이 그저 시대의 패배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다음 왕조의 청사진을 향한 하나의 제도로서 분명 자리매김 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다른시기와는 다른 독특한 개혁과정을 겪는다. 국왕 스스로 먼저 개혁을 단행 하고, 이어 다른 사람도 아닌 국왕에 의해 개혁을 실시할 집권자가 선택이 된다. 또한 이 집권자는 처음부터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자신의 집권을 통해 새로운 지배세력을 양상시키게 된다. 이처럼 개혁자가 개혁자를 형성시키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 중 어느하나 빠진 부분이 있더라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구조상의 흐름이다.
물론 역사의 경우 가정은 성립하지 않지만, 신돈과 신진사대부의 역할이 결집화 되어 큰 힘을 발휘 했더라면, 조선의 성립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찬란했던 고려왕조의 아스라지는 과정을 개혁하려던 개혁세력의 모습을 되짚으며, 개혁의 통쾌함보다는 왕조의 사라지는 뒷모습이 더 아쉬웠던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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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용,「신돈, '요승'이름 뒤에 숨은 개혁자의 모습」, 2003
정옥자,「麗末 朱子性理學의 도입에 대한 試考 -李齊賢을 中心으로-」,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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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배, 「공민왕대 초기 측근 중심의 개혁정치와 그 한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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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27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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