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지배세력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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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초기 지배세력의 성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지배세력 변화에 대한 논의들
1. 고려말 사대부의 성격
1) 사대부의 성격과 시기구분
2) 세족의 성격
2. 여말선초 지배세력 변화에 대한 논의
1) 조선 초기 관인층에 대한 연구
① 이동희의 견해
② 김창현의 견해
3. 비판적 고찰

Ⅲ. 이방원과 정도전
1.정도전 대 이방원
1)정도전의 군 개혁
2)정도전과 왕자들의 대결
2. 태조 세자책봉에 대한 왕자들의 반발
3. 제 1차 왕자의 난
4. 비판적 고찰

Ⅳ.세조의 평가
1. 세조의 집권 과정
2. 세조의 중앙집권 정치
1) 제도의 완성
2) 세조의 왕권 강화
3) 민생안정 및 자주적 국가․문화의식
3. 세조대 정치의 한계
1) 정권 자체의 정당성 결여
2) 지나친 왕권 강화에 따른 폐단
4. 비판적 고찰

본문내용

위하여 실시한 직전법과 보법의 여파로 중앙관료는 경제력이 취약해졌고, 일반 양인과 같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이에 이들은 중앙 정부에 대해 더욱 더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세조의 왕권이 강력할 때에는 불만을 표면화하지 못하다가 세조 12년 이후에 세조의 신병으로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한명회 등이 원상으로서 정치를 주도하게 됨에 따라 왕권이 동요하자 서서히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한편, 중앙의 관인들도 불만을 가졌지만 지방 세력가들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세조 10년경부터 지방 세력가는 반자치적인 성격을 가진 유향소를 중심으로 저항하였는데, 토착세력이 강한 충주 청주지방과 함길도 지방의 저항이 특히 심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조 13년 5월에 이시애 난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시애는 할아버지 원경과 아버지 인화가 검절제사 검교문하부사와 판영흥대도호부사 첨절제사를 역임한 길주지방의 토호로서, 세조 4년 경흥진병마절제사가 되고 이후 행지중구부사와 판회령부사를 역임하면서 함길도의 대표적인 세력가가 되었다. 함길도는 조선의 발흥지이고 북방 야인지역과 접한 관계로 지방관은 그 곳 호족 중에서 임명하여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고, 남방민을 이주시켜 방어를 도모하였다. 그런데 세조대에는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특히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 함길도병마절도사인 강효문과 그 당여가 불법 탐학을 자행하여 민중의 원성이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조 13년 4월 이시애는 동생 시합 매부 이명효 등과 함께 '하3도 군병들이 수륙으로 함길도로 진격하고 있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어 설한령으로부터 북도에 들어와 장차 본도 사람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말로 민중을 선동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길주에 와 있던 절도사 강효문과 길주목사, 부령부사 등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모두 살해하고, 조정에 대해서는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 등의 중신과 결탁하여 모반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먼저 죽였다'고 하면서 거병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이 후 이시애는 도내 각지의 유향소 토호들과 농민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단주 북청 홍원으로 진격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모두 죽였다. 또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면서 함흥을 점령하고, 함길도 관찰사 신면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을 사로잡는 등 삽시간에 함흥 이북지역을 석권하였다. 조정에서는 귀성군 준을 함길 강원 평안 황해도 도총사, 호판 조석문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절도사,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반군을 진압케 하였다. 처음에는 반란이 기세를 떨치고, 조정내부에서도 반란군이 한명회 신숙주 등 중신들이 자신들과 내응하고 있다고 한 이간책에 말려들어 차질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먼저 반군의 고립을 도모하고 반란지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반군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어 동년 8원에 홍원 북청 이원 등지의 싸움에서 반군이 대파하고 이시애 형제를 체포 참수함으로써 난을 진압하였다. 이 난이 진압된 후 조정은 57인의 적개공신을 책봉하였고 지방반란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남북으로 양분하여 통제를 강화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조는 정권 자체의 취약성으로 인해 측근 세력 확보를 목적으로 다수의 공신을 책봉하였으며 이들에게 다양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흔히 강력한 전제군주였다고 알려져 있는 세조조차도 자신의 지지세력 자체를 도외시할 수는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의존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던 것이다. 세조는 이들에 대해 반역에 관련된 죄가 아니고서는 끝까지 원훈을 왕권과 일체로 생각하여 보전해 가고자 하였다. 이에 결국 처벌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었으므로 사회 도처에 비리가 만연하게 되었다. 관리들은 기강이 해이해져 뇌물을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를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고 그 속에서 힘없는 백성들의 피해만 늘어갔다.
4. 비판적 고찰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있어서 많은 수의 국왕 중에서 오늘날 언급되는 통치자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각각에 대해 일반에 알려져 있는 사실 또한 제한되어 있다. 세조 역시 그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우리는 단순히 '세조'라 하면 조카를 죽인 비정한 숙부 내지 정변을 통해 정당성 없는 정권을 획득한 비윤리적 비도덕적 지배자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 제반의 제도를 정비함과 아울러 민생안정을 위해 노력하였고 또 한편으로 자신의 왕권 강화에 힘씀에 따라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세조는 능률적인 측면에서는 훌륭한 임금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세조의 정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이것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즉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세조의 정치를 평가하려면 세조의 정치적 업적과 함께 그 시대가 지향하는 이념적인 가치와의 관련성을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근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능률, 효율만이 강조됨에 따라 최근에 이르러서는 세조의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보다는 그 업적의 문제에 치우쳐 세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적 가치라는 측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정치라는 것은 효율만 강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세조의 업적이라는 측면과 아울러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관인 유교적 시각에서 세조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한계점을 살펴보았다. 결국 세조는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측면에서의 효율적 극대화는 이룰 수 있었으나 당시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던 통치를 행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던 부정적인 평가를 하던 그것은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다만,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객관성을 견지하는 한편, 현대의 시각의 시대적 가치도 함께 고려하며 세조의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현실에 적용하여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한편 유익했던 점은 살려나가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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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4.27
  • 저작시기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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