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답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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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원 화성 답사 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후의 화성

제원 조사

축성 동기

축성 계획

화성의 여러시설

성문

관계 인물

수원 답사기

본문내용

東北角樓)라고도 불린다. 중국 송대 학자 정명도의 시선에서 따옴.(사적 제 3 호.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소재 )
방화수류정은 수원성의 여러 시설중 하나로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현존하는 정자 중 비원 내의 정자와 더불어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의 구성은 2개의 층으로 되어있고 1층에 해당하는 기단부는 일반적인 성벽의 기능을 수행토록 만들었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정자를 만들었다. 망루를 만든 셈이다.
또 성밖에는 용연(龍淵)이라고 하는 못을 파서 적의 접근을 막도록 했다.
평소에는 물에 비친 정자가 아름다워 군사시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지붕의 깜찍하게 다듬어진 형태는 내부 기둥들의 독특한 배치를 그대로 표현한다. 몇 평 안되는 좁은 면적안에서 만들어지는 공간의 묘미는 우리 건축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형의 옹색함을 훌륭한 내부기둥의 절제와 요령있는 사용으로 극복하여 공간은 많은 표정을 갖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기둥과 기둥을 잇는공간구획 방법에 따라 수많은 평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
- 여행넘어서기 중에서 -
이 방화수류정에 들어 갔을때 고건축물에 문외한인 나도 무척이나 감명 깊었던 것이 바로 이 기둥의 배치였다. 이 방화수류정의 평수는 대충 우리 학생들이 생활하는 일반적인 자취방보다 약간 더 넓은 정도이다. 내 친구놈도 자취를 하는 녀석이 꽤 되는데. 무얼 놓으려고 해고 일단 방 규모가 작고 방 형태가 정사각형이다 보니 물건 배치에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지금 이 건물의 마루를 보고 그 생각이 난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만일 이와 똑 같은 구조의 방이었다면 아마도 그 친구녀석 냉장고와 장롱은 충분히 자리를 했을거라 본다. 그만큼 작지만 활용을 잘하면 군더더기 없는 실평수를 써 먹을수 있는 것이다. 마루 바깥은 겉보기에는 매우 협소한 자리처럼 보였지만 왠걸, 직접 가보니 사람 하나가 충분히 가고도 남는 치수이다. 이 작은 건물을 구획 할 때도 그들은 성의 방어적 개념과 인체 스케일을 고려했다는게 깡통맨인 나도 거기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건축의 달인들.... 이 여행을 하면서 자꾸만 내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발 맞추어 나가자 앞으로 가자... 계속 가다보니 궁술 연습장으로 보이는 큰 공터가 있다. 이 성안에 이런 큰 빈 공간이 있다니... 의외였다. 사병들의 훈련장이 아니었나란 짐작만 했을 뿐이다. (사진은 거기에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거친돌을 박아서 만든 길이 꼭 부석사 때 그 길과 비슷하더군요.)
동장대(東將臺)
사도세자의 원침을 화산으로 옮기고 원침을 보호, 행궁을 옹호할 목적으로 화성을 쌓을때 군사의 훈련장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연병장의 지휘 본부. 속에 연무대가 있다.
동북포루(東北鋪樓)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 설치된 포루, 근방과 지세가 가장 높고 용연을 굽어보는 자리여서 중요시 하던 곳. 돌출된 치성 위에 누각을 설치 정면, 측면 각각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사방에 판벽을 낸 점이 북포루와 같다. 이 건물은 각건대(角巾臺)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수원성에는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등 여러형태의 성곽과 문이 있었다. 전부다 사진에 담기 위해서는 택시를 타야만 했다. ( 해질 시간이 다되어서 ) 그러나 내 수중엔 택시를 탈 돈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 카메라 필름도 다 떨어져서 눈물을 머금고 이제까지 탐방한 사진만을 가지고 돌아와야 했다. 저녁 늦게까지 수원성 주위를 맴돌았지만 결국 수원성 전체를 다 보지는 못했다.
조선후기 경세가 양 성지(梁 誠之)는 우리 나라가 성곽의 나라라고 했다. 1971년 당국의 공식적인 집계에 의해 1,115개소의 성곽이 한국에 남아 있다고 발표 되었으나 실제는 이보다 훨신 많다.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성곽은 우리 민족과는 땔래야 땔 수없는 전쟁에서의 방어 도구였다.
조선시대 성종때까지 차차 그 성곽의 규모를 갖추던 것이 평안한 시절이 계속되자 전망이 없는 발전의 백지화에 이르렀다. 유 성룡이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을 연구하여 이 기술들의 핵심을 우리나라의 성곽에 응용하려 했으나 주위 모든 여건이 충족되지 않아 흐지부지 되었다. 결국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성곽의 비판이 일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성리학적 위정자들은 학문을 실생활에 반영하는게 서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간이 지나자 실학자들 사이에서 성곽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18세기 영조, 정조시대에 수많은 성들이 중국식과 일본식의 장점을 받아들여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 모든 과정의 역량을 한데 모아 우리나라의 사정에 맞게 독창적으로 개량 되어진것이 바로 수원성이다. 그리고 이같은 역사를 화성성역의궤 10권 10책에 담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수원성의 축조에 정조를 비롯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얼마나 이 사업을 중요시 했는지 유추 할 수있다. 혹자는 이 수원성이 중국의 모방품 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종래의 전통적 축조술에서 우리 성이 갖는 약간의 약점에 다른 나라의 기술을 우리 실정에 맞게 개량하여 우리것으로 소화 시켜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부산행 열차표를 예매하니 돈이 거의 바닥이 났다. 먹는것과 자는것에 돈을 거의 쓰지 않아서 10만원으로도 충분히 여행을 해낼 수 있을것 같았는데 기차 몇번 타고 버스 몇번 타니 도로아미타불이 되버렸다. 삼촌댁으로 가는 늦은 시간 버스속에서 수원시내를 보았다. 하루하루 먹고 자고 입는 것에 걱정을 하고있는 나 자신을 보니 씩 웃음이 났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재석이 너 지금 잘하고 있는거야. 최선을 다해봐.' 조금씩 내 자신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양심에 비추어서 보면 이 행동들이 결코 후회가 되지 않았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지금의 이 뿌듯한 마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승강장에 내렸다. 저 멀리 사라지는 빈 버스의 뒷머리를 보면서 나 자신 스스로에게도 다짐한다.
이 사회에 나가서도 지금 이순간의 마음을 절대 잊지 말자고..... 화 이 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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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01
  • 저작시기2004.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8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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