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고대 국가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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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의 고대 국가 성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신라의 명칭 유래

(2) 신라의 건국

(3) 신라 역대 왕들의 업적

본문내용

신라에 시호법이 사용되었다.
제 23대 법흥왕 (재위: 서기 514년-540년)
지증왕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이며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朴氏)이다. 신장이 7척이나 되고 도량이 넓으며 남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체를 완비하였다.
법흥왕은 이와같이 대내적인 안정을 기반으로 하여 대외적인 영토확장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522년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므로 왕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그뒤 법흥왕은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지방을 순수(巡狩)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또한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법흥왕은 제위 27년만에 죽었고,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에 장사지냈다.
*불교의 공인
법흥왕 15년에는 신라의 문화·종교상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불교가 공인되었다. 고구려나 백제는 아마 4세기말에 불교를 들여와 국가·사회적으로 널리 믿게 되었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다른 나라의 몇몇 승려가 포교를 위해 국경지역에 일시 들어왔던 설화적인 사실이 사서에 전하고 있으나 불교가 전파되어 널리 믿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5세기 마립간 시기에 고구려의 군사·정치적 영향력이 커져 신라의 왕자들이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고구려에서 널리 믿어지던 불교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며, 실성마립간이나 눌지마립간 등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온 이들이 재위하면서 불교가 일단 왕실 내에 들어왔을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는 각 지역의 주민들은 조상신이나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산천신(山川神) 등을 섬기고 있었으므로 비록 신라라는 국가의 주민으로서 한 나라를 이루고 살고 있었지만 신앙 면에서는 일체감을 갖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왕실의 조상을 숭배하는 신궁(神宮)이 설치되고 그에 대한 신앙이 국가적으로 강조되었다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가장 힘있는 정치세력집단인 왕실의 조상이라는 한계를 가진 것으로 결코 모든 신라인의 조상으로 인식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비해 불교는 한층 세련된 철학적 논리체계와 석가모니라는 뚜렷한 인격신의 존재에 더해 다양한 신들이 등장하여 보여주는 사실감 등에서 종래의 소박하고 막연한 신앙체계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구의 조상이나 기왕의 어떤 신도 아닌 부처님은 부족적 전통을 극복하고 국가구성원으로서의 일체감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당시 신라에서 보편적 신앙대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법흥왕은 국가체제를 정비해가면서 당시 범 동아시아적 사상인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왕실의 위상을 높이고 국가구성원의 종교·사상적 일체감을 얻을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다.
이때 왕을 시중들던 측근 관리인 이차돈이 왕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왕의 소원대로 불교를 널리 믿게 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왕은 거절하고 망설였으나 결국 그의 제의를 수락하고 꾀를 내어 불교 공인을 위한 계략을 펼쳤다. 지금 경주에 해당하는 서라벌에는 계림(鷄林)을 위시하여 숲이나 강가 등 일곱 곳의 신성한 장소가 있어 그곳에서 전통적인 신들을 숭배해왔다. 그중에 천경림(天鏡林)이라는 숲이 있었는데 이차돈은 왕과 짜고 이 신성한 천경림에 절을 지으라는 왕명이 있다고 전하였다. 이에 놀란 귀족들이 중지할 것을 간하니 왕은 이차돈을 불러 왕명을 거짓 전했다는 이유로 크게 책망하고 그를 처형하도록 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의 목을 자르자 젖 같은 흰 피가 한 장(丈:10자)이나 솟아오르며 하늘이 흐려지고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러한 기적 끝에 법흥왕은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내 마침내 불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 율령의 반포
법흥왕 7년에는 국가체제 정비의 핵심을 이루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법에 의한 국가 지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율령이란 죄에 대한 처벌을 정한 형률(刑律)의 율(律)과 무엇을 어찌하라는 규정으로의 영(令)이 합쳐진 오늘날의 법률에 해당하는 중국 왕조시대의 전통적인 법인데 이러한 법체계를 마침내 신라에서도 받아들여 반포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넓은 영토와 많은 주민을 지배하는 데 매우 큰 효과를 본 바 있는 이 법체계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때 고구려에 들어왔으며 백제에도 유사한 시기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발전이 늦어 법에 의한 전국적 통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한던 신라는 이때에 와서야 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율령을 마련하고 공포한 것이다.
법흥왕 때 율령이 반포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그 신빙성을 반신반의하였는데 1988년 봉평비가 발견되어 이 비문에서 ■■왕의 법■■이 실재했음이 밝혀짐으로써 자연스럽게 확인되었다. 율령이 반포되기 이전 종래의 통치는 주로 관습에 의거했는데 관습은 그 속성상 전통 지향적이고 보수적이서 과거의 족장 출신인 귀족들의 기득권을 크게 존중하는 특성을 가진 데 비해 성문법인 율령에 의한 지배는 국왕의 이익 나아가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귀족들의 특권을 어느 선에서 제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반 백성들의 부담을 일부 덜어줄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율령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귀족관료들의 위계질서를 정하고 특히 이 위계에 따른 옷의 색깔 즉 복색(服色)을 정해 귀족관료사회의 단일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그 정점에 국왕이 자리하여 이제 외부에 그대로 드러나는 옷차림에서부터 왕과 신하의 차등을 명확히 함으로써 왕의 권위가 그만큼 확연해진 것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신라 왕조 실록』, 웅진, 서울 ; 2001
일연 저 박성봉 고경식 역, 『삼국유사』, 서문문화사, 서울 ; 1995
강무학, 『삼국사기 신강-신라본기 편-』, 청화, 서울 ;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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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09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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