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서 러일전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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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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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는 일본과 청국 군대가 조선에 도착한 직후인 5월 11일(양력 6월 14일) 내각회의를 열고 "청 일 양국이 조선의 혼란을 진압하고 내정을 개혁하는 데 협력할 것"을 청에 제의하면서 청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 단독으로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결의했다.
당시 조선을 장악하고 있던 청은 일본의 제안을 거부하고 두 나라 모두 조선에서 철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5월 하순 서울과 인천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수는 약 6000명에 이르렀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조선에서 밀려난 일본의 최고 지도부는 국력을 키워가며 조선에 다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동학 농민 봉기가 발발하자 군부는 첩보 장교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현지 상황을 파악한 후 "동학란을 계기로 병력으로써 조선 정부의 개조를 단행하여 부진한 일본 세력을 회복할 것"을 내각에 건의했다.
당시 반대 정파들이 장악한의회의 내각 불신임 등으로 정치적 곤경을 겪고 있던 이토는 군부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토는 이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서게 됐고, 11년 후에는 조선의 외교와 군사를 장악하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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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11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9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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