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말(元末)에서 명초(明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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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말(元末)에서 명초(明初)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설

2.혼란스런 원말(元末)

3. 백련교도의 흥기

4. 난세에서 통일로

5. 명의 개국, 다시 평화의 치세로

6. 결 론

본문내용

. 어기는 자는 참한다.'라는 철폐를 세워 외척과 환관이 정치에 간여할 수 없도록 엄금하였다.
이처럼 주원장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군사를 독립시켜 권력의 분산을 도모하고 아울러 감찰기관의 직권을 강화하여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이것을《대명률》을 제정·반포하여 법률로서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역대 왕조의 폐해였던 외척과 환관의 정치 간여를 사전에 엄금하여 더욱 더 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중앙 및 지방의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국가 재정의 확보와 민중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홍무 14년과 20년에 각각《어린도책》과《부역황책》을 만들었다. 즉, 토지대장인《어린도책》과 호구대장인《부역황책》을 만들어 국가 재정의 확보는 물론 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부역황책》의 작성을 통해 조세징수의 기반을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이갑제를 실시하여 농촌 구석구석까지 지배력을 파급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부역황책》은 호구를 이갑으로 하여 작성하였는데, 110호를 1리로 삼아 정량이 많은 지주 10호를 이장으로 하고 나머지 1백 호를 10갑으로 하여 1년씩 차례로 돌아가며 1갑이 역을 부담으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를 통해 <부역황책>이 작성되었고 또한 작성된 대장을 통해 조세를 징수하였던 것이다. 즉, <부역황책>과 이갑제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것이며 어느 한 쪽을 차치하고서는 명조의 조세징수와 민에 대한 통제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육유'를 발포하여 농민들이 왕조통치에 순응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하였다.
또한 주원장은 교육과 관원의 임용에 있어서도 수도 남경에 국자감, 지방에도 각각 부학, 주학, 현학을 설치하여 교육의 내실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관리 임용에 있어서도 전대와 마찬가지로 현시-부시-원시-향시-회시-전시 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사상의 통제를 기하기 위하여 팔고문이라는 답안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였다.
이처럼 국가 전반 체제를 정비하고 쇄신하여 국가 통치의 기반을 이룩하였지만 주원장 자신이 지방의 반란 세력으로 성장하여 국가를 개창한 것인 만큼 국가 전체에 대한 통제에 만반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경제의 중심지이며 자신의 창업이 이루어진 시발점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수도를 국토의 동남부에 치우친 남경으로 정하여 더더욱 국가 전반에 대한 통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주원장은 서한 전기의 군국제도를 답습하여 10명의 자제를 북변의 중요기점은 물론 국토의 전반에 걸쳐 번왕으로 임명하여 이러한 취약점을 보완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왕을 임명하는 분봉정책은 번왕의 임명시 행정은 물론 군사에 대한 막중한 권한을 주어 후대 연왕이 정난의 변을 일으키는 커다란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주원장은 중국 변방의 소주민족에 대해서도 현지의 토사로 하여금 현지의 관습에 따라 다스리도록 하는 한편 이에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유관으로 하여금 직접 다스리도록 하는 '개토귀류'의 정책을 펼쳐 이들에 대한 지배를 탄력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리고 아직 웅거하고 있던 원의 잔여세력을 퇴치하여 원에 대한 우환을 제거하였고 동북지역에 있는 조선, 여진 등에 대해서도 조공 및 기미정책을 실시하여 바야흐로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체제를 이룩하였다.
요컨대, 주원장은 초기의 백련교도에서 탈피하여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면에서 일련의 제도 정비를 이룩하여 지배를 공고히 하는 한편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원장의 정책으로 인하여 혼란으로 치닫던 중원은 다시 평화의 치세로 탈바꿈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국가의 초석을 마련하기 고심한 주원장이었지만, 금의위를 통한 관리의 가혹한 감시 및 통제, 그리고 호유용·남옥의 옥을 통한 공신세력 제거, 그리고 홍무 17년부터 29년까지 일어난 문자옥은 황제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명분 아래 무차별적으로 관료들에게 내려진 형벌과 사살 등은 가혹함과 무자비함을 드러내어 그의 치적에 있어 어두운 면을 나타내고 있다.
6. 결 론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이룩하였던 원은 왕위 쟁탈전 및 관료들의 부정부패 라마교의 신봉으로 인한 경제의 파탄 그리고 민족차별에 기인한 가혹한 민중수탈이라는 내부적 모순으로 인하여 스스로 왕조의 운명을 재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적 모순과 혼란은 자연스럽게 농민들의 봉기를 촉구하게 되었고 당시 비밀조직이었던 백련교와 결합되면서 저항의 힘을 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주원장은 무엇보다 민생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전략·경제적 요충지를 자신의 세력 하에 두고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중국 통일을 이룩하여 명을 개창하게 되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전란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데 주력을 기하는 한편, 황제 중심의 통치 체체를 이룩하기 위하여 일련의 제도 개혁 및 정비를 착수하였다.그리고 주원장의 이러한 일련의 정책을 통하여, 명의 통치 체제의 기반이 이룩되었고 이를 통해 명은 명실공히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화체제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요컨대, 원말에서 명초로 이루어지는 시기는 10세기 초 요의 건국을 시점으로 정복왕조로 인하여 많은 전란을 겪었던 중원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다시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과거 중화 중심 체제를 복원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에서 황제 중심 체제하에 제도 및 문물을 정비한 주원장의 치적은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아울러 개인적으로 난세를 평화의 치세로 변모시킨 그의 전략과 시책은 높게 평가받아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참고 문헌>
오함,《주원장전》, 지식산업사
이명근 편역,《중국역사, 하권》, 신서원
중국 근대사
원말(元末)에서 명초(明初)까지
목 차
1. 서 설
1
2. 혼란스런 원말(元末)
1
3. 백련교도의 흥기
4
4. 난세에서 통일로
5
5. 명의 개국, 다시 평화의 치세로
7
6. 결 론
10
학 과
역사교육과
학 번
99270013
성 명
김 민 규

키워드

원나라,   명나라,   원말,   명초,   중국,   중국역사
  • 가격2,0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4.05.23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2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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