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케이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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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엘렌케이 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Ellen Key에 대한 설명

2. Ellen Key의 교육 사상

3. 관 련 논 문

4. 관 련 자 료

5. 관 련 기 사

6. 인 터 넷 자 료

7. 우리 나라에 끼친 영향

본문내용

의 신장을 촉구한 한국 초유의 여성계몽운동이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여성해방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여성운동이 명실상부한 성해방운동으로 확산된 것은 외국 유학생들이 신교육을 받고 돌아와 조선에 하나의 사회범주로 등장하고 그들에 의해 서양식 여성해방운동론이 이식되었던 1920-3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근대적 자각을 한 해외파 일부 지식층 여성들 스스로가 성해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남성들과 공유될 수 없는 성해방 운동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 민족주의로 일관되었던 1단계 여성운동과는 달리 이 2단계 여성운동은 이데올로기의 양대 흐름을 조성하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자유연애론과 새로운 성도덕관을 표방하는 자유주의 여성해방운동은 1920년대에 한국에 유입된 이래 널리 파급되었던 한편,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1920년대에 소개된 마르크시즘과 사회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신간회, 근우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개진, 1930년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이식된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상은 한국의 특수 상황 속에서 편파적으로 수용되거나 변질된 것이었다.
자유주의 여성운동은 평민출신이면서 서구문물을 수용한 신여성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당시 신여성은 김활란과 같은 선교학교 출신의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과, 김일엽, 김명순, 나혜석과 같은 유학파 여성 문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전자가 자유평등의 기독교 신념에서 여성계몽교육운동을 펼쳤던 반면에 후자는 서구의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을 수용하여 자유연애를 여성해방과 동일시하는 반유교적 여성해방론을 표방하였다. 또한 전자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집단적 선교운동에 참여하였다면, 후자는 고립적인 문필활동을 통해 개인적이고 간접적인 여성운동을 수행하였을 뿐이었다.
자유주의 여성운동가들은, 개화파 남성들의 지지와 관료층 남편들의 비호 속에서 근대화에 편승하며 사회적 명성을 얻었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나, 보수적 신앙운동을 기반으로 사회 진출의 지위 상승을 누려던 기독교 여성들과 대조적으로, 가부장제에 위배되는 자유연애를 부르짖었던 까닭에 사회적 지탄을 받고 선구자의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운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자체가 함의하는 반봉건적이고 반가부장적인 사상, 특히 유교 전통의 한국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서구적 발상의 성해방 논리에 기인한다. 19세기 말에 발단된 서구 여성운동은 남녀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여성의 참정권과 노동권익을 주장한 인본주의 차원의 여성운동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사회적 권리보다는 성 자체에 주목, 성욕을 건강한 삶의 일부로 파악하고 정치적, 직업적 평등과 같은 선상에서 여성적 성애와 에로티즘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페미니즘 기획에 성애의 문제를 대두시킨 선구적 인물이 스웨덴 페미니스트 엘렌 케이 Ellen Key이다. 케이는 프로이트의 성심리 이론이 성행하던 무렵 사랑과 결혼에 대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 성도덕률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케이는 사랑의 관계는 자유를 기반으로해야하고 성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결혼만이 유효하다는 견지에서 미혼부부를 지지하고 비합법적 출산이라는 개념자체를 거부하였다. 또한 그녀는 결혼이 경제적 파트너임을 역설, 아내가 남편 수입의 반을 소유해야 하며 미혼모나 미망인은 모성적 노동에 대한 대가로 정부지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였다.<참고3>케이의 이러한 사상은 새로운 여성성의 과학으로 숭상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전파, 1920년대 한국의 지성인들에게도 상당한 호소력을 갖고 파급되었다. <참고4>나혜석, 김명순, 김일엽과 같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초창기 페미니스트들에게 이러한 케이의 사상은 일종의 신약으로 작용했을 것이며, 실로 이들의 급진적 여성관은 사랑의 기반이 없는 결혼을 악덕으로 간주한 케이의 근대 연애관에 대한 공감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들은 여성의 역할보다는 성애 자체만을 강조하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을 외면함으로써 케이 이론이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본 뜻을 왜곡하였다.
1) 나혜석이 최초의 여자 미술 유학생으로 알려져있지만 1910년 10월 <매일신보>가 일본에서 수예를 전공하고 귀국한 이원자의 소식을 보도하고 있어 이미 나혜석 이전에 유학파 여성미술학도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김현숙 "초기 여류화가들의 위상", <월간미술> 1989. 3. p. 63. 남성 유학생의 경우, 지운영이 1904년 유화학습차 청나라 상해에 간너가고 이종찬이 1909년 미국 유학후 귀국한데 이어,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이 1908-1909년 사이 일본으로 유학, 1910년대 중반에 귀국한다. 윤범모 "한국 근대유화의 전개양상", <근대를 보는 눈>(삶과 꿈, 1997), p. 19.
2) 이상 민족주의 여성운동에 관하여 이효재 "개화기 여성의 사회진출", <한국여성사: 개화기-1945>, (이대출판부, 1972/1993), p. 23-109. 이효재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 (정우사, 1989). 참조.
3) Nancy F. Cott, The Grounding of Modern Feminism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87), p. 46-48.
4) 1921년 <개벽>2월호 노자영이 "여성운동의 제일인자 엘렌 케이"를 발표한데 이어, 1926년 외관생이 <신여성>에 "여성운동의 어머니인 엘렌 케이 여사에 대하여", 권명범은 <시대일보>에 "엘렌 케이 여사의 별세일을 당하야 그 사상을 소개한다", 이헌구는 <조선일보>에 "엘렌케이 여사의 생애와 사상"을 게재하였다. 김복순, "지배와 해방의 문학: 김명순론", <페미니즘과 소설비평: 근대편> (한길사, 1995), p. 57.
5) Alice S. Rossi ed., The Feminist Papers: From Adams to de Beauvoir (New York and Londo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3, p. 496-497.
6) 허정숙에 관하여 서형실, "정열의 여성운동가 허정숙", <여성과 사회>제3호(창작과 비평사, 199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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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4.05.23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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