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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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특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근세 사회- 조선 전기 (양란 까지)

1. 근세의 정치적 변천
(1) 정치 체제의 확립
(2)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3) 왜란과 호란

2. 근세의 사회와 경제
(1) 사회 구조와 향촌 사회
(2) 경제 정책과 경제 구조
(3) 경제활동

3. 근세의 문화-성리학의 발달


Ⅱ. 근대 사회- 조선 후기(문호개방 이전까지)

1. 제도의 개편과 정치변화
(1) 통치체제의 개편
(2) 정국의 변화와 탕평책
(3) 정치질서의 파탄

2. 경제구조의 변화와 사회변동
(1) 생산력의 증대
(2) 사회 구조의 변동
(3) 사회 변혁의 움직임

3. 문화의 새 기운
(1) 사상과 학문의 동향
(2) 사회 개혁론의 대두

본문내용

만을 고집하는 보수적 학자들의 반발로 좌절되고 말았다.
이어서 17세기에는 안으로 분열된 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밖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국가 역량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한백겸, 이수광, 유형원 등은 국가 체제를 개편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개혁의 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였다. 특히, 한백겸은 토지 소유의 지나친 편중을 개탄하고, 농민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한편, 민생의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하여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 후 실학 운동은 서양에서 전래된 과학적 지식, 청나라의 고증학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보다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전개되었다.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현실을 철저히 분석하였고,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논리로 자신의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
농업 중심의 개혁 사상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먼저 농촌 문제에 쏠렸다. 당시 농촌 사회의 안정 여부는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농민층의 분화가 날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여, 농민층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군사 제도, 교육 제도 등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는데, 그 때문에 이들을 중농 학파 또는 경세 치용 학파라고 한다.
실학자들은 특히 토지 소유의 편중으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다고 여겨,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토지 제도의 개혁 방안에는 차이가 있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웠다. 그는 관리, 선비, 농민 등에게 차등을 두어 토지를 재분배하고자 하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진보적 입장에서 자영농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영농을 바탕으로 농병 일치의 군사 조직과 사농 일치의 교육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호 학파(星湖學派)를 이룰 정도로 많은 제자를 키워 낸 이익은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일정한 토지를 영업전으로 하고, 그 밖의 토지는 매매할 수 있게 하여 점진적으로 토지 소유의 평등을 이루자고 제창하였다. 나아가 그는 나라가 빈곤하고 농촌이 피폐한 것은 양반 제도,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사치와 미신 숭배 때문이라고 하여 그 시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한편, 실학을 집대성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백여 권의 저술을 남긴 정약용은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여전론이란, 한 마을을 단위로 하여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노동량에 따라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공장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로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정약용은 더 나아가 농민 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하여 향촌 단위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여, 백성의 이익과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 있는 정치 제도에 대한 개선 방안까지도 제시하였다.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자들은 토지 소유 문제뿐 아니라 농경 기술의 개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수리 시설의 확충, 종자와 농기구의 개량, 경작 방법과 시비법의 개선 등을 제시하였다. 농업 기술에 관해서는 특히 북학론자들의 관심이 컸는데, 그들은 청나라의 선진 농업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 사상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국내 상공업의 발달과 청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혁신 등 물질 문화에 관심을 보인 학자들이 나타났다. 물질 문화와 부국 강병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중상 학파 또는 이용 후생학파라고 하는데, 청나라 문물의 수용을 주장했으므로 북학파(北學派)라고도 한다.
북학파의 선구적 역할을 한 유수원은 우서에서 중국과 우리 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에 제시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농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상공업을 진흥시켜 나라 살림을 튼튼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 농, 공, 상의 직업적 평등화와 전문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노론 명문 출신인 홍대용은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임하경륜, 의산문답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균전제를 주장하여 농업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기술 문화의 장려와 신분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 강병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박지원에 이르러 북학 사상은 한층 발전되었다. 일찍이 그는 과농소초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문제에 관심을 쏟은 바 있었는데, 청나라에 건너가서 생산과 유통의 중요성을 실감한 다음부터는 상공업 진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즉, 수레와 선박의 이용이나 화폐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양반 제도의 비 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의 사상은 박제가에 이어져서 보다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나라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나라 문물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방안으로 청나라와의 통상을 강화할 것과, 수레나 선박의 이용을 늘릴 것, 그리고 절약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시킬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은 민족적, 근대 지향적 성격의 학문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컸다. 그러나 실학은 대체로 정치적 실권과 거리가 먼 몰락한 지식인들의 개혁론이기 때문에 당시의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 참고문헌
- 이성무, 『조선왕조사 1, 2』, 동방미디어, 1998
- 한영운 외,『한국사 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1
- 편집부 편, 『 한국사 34:조선 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 정재준, 『한국사(맥)』, 서울고시각, 2000
- 김현영, 『조선시대의 양반과 향촌사회』, 집문당 , 1999년
- 한영우,『다시찾는 우리역사 2: 조선시대』,경세원,1998
- 신용하, 『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 지식산업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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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27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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