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향가연구 - 처용가,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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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노래와 기록문
2. 처용은 누구인가
3. 설화 구조 연구

Ⅲ. 결 론

본문내용

.」
이상호 : 삼국유사 권제 4 해제 5, 보양과 배나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960
위의 설화 둘의 공통점은 호국불교를 위해 호법룡이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승을 돕게 하는 것이다. 이는 동해용이 왕에게 처용을 보내 정사를 돕게 하는 구조와 같다. 이는 다음 도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용 --------------------->> 승 용 -------------------->>왕
용자 (호법 호국 기능) 용자 처용 (호국기능)
용 <<-------------------- 승 용 << ------------------ 왕
절 (보답) 절 (보답)
즉, 동해용이라는 화소는 기존의 용신 사상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불교 설화 중 하나의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해용이 왕에게 처용으로 국정보좌의 기능을 하도록 하고 그 보답으로 망해사를 짓게한 이야기구조는 불교설화의 보편적 구조를 따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처용랑과 망해사조라는 커다란 서사구조내에서 국종망의 원인을 설명하는 기능을 하는 처용설화를 살펴보았고 처용설화가 독립적으로 어떻게 형성 변이과정을 거쳐왔는가를 살펴보았다. 기존의 연구들은 처용설화의 가장 근본이 되는 처용가보다는 이미 민중들에 의해 변형된 처용설화에 집중하여 처용을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처용가는 처용설화의 중심이 되며 가장 가까이에서 처용을 보여주고 있다. 즉 처용은 벽사신, 용의 아들 그 이전에 아내와 외간 남자의 간통을 목격한 한 남자이다.
(4) 헌강왕대의 시대상황
우선 신라 하대의 정치적 성격을 보면 왕위가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위에 의해 결정되고, 왕이 귀족 전체의 대표자가 아니고, 그를 추대한 일파의 대표자로 전락한 宣德王이나 元聖王에 의해 표징된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대엔 골품제도의 모순과 왕권의 약화, 왕권교체와 왕위쟁탈전에 말미암은 지배층의 분열과 상쟁 몰락, 진골과 육두품과 도당유학생과 지방호족의 골품제에 대한 불만과 반중앙정부적 반항, 귀족문화와 서민 문화의 유리, 대상인 호족의 대두, 지식인들의 노장사상에의 심취, 禪宗과 지방호족과의 연결로 인한 사원결제세력의 형성,몽민의 유민화와 群盜化 - 이같은 말세적 현상을 보이던 지방호족의 발호로 결정적으로 분열됨으로써 후삼국시대로 들어서는데, 이같은 眞聖王代의 颱風前夜에 해당하는 것이 헌강왕대인 것이다.
경문왕대의 뒤를 이은 헌강왕대는 이전의 정치적,사회적 불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동시에, 모든 경제적 부와 권력이 서울(경주)에 집중된 까닭으로 다른 지역은 갈수록 경제적 빈곤과 더불어 몰락해 갔으며 실질적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뒷받침해야 했던 하층민들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다. 이 때에 하층민들의 저항은 이전보다도 더 치열했을 것이며, 이것은 지배층에게도 심각한 위기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性이 聰敏하고 독서를 좋아하여 한번 본 것은 다 입으로 왼』인물이었던 헌강왕은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불안이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라 생각하고, 유교정치 구현을 위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에게 經義를 강론케 하기로 하는가 하면, 불력에 의한 왕권회복과 호국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호국사찰인 황룡사에 행차하여 百高座를 베풀고 講經을 둔기도 하고, 때로는 민심수람을 위한 지방순행을 했으며, 국가 경제의 파탄위기를 극복할 의도로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각종행사(주로 민속제의)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헌강왕은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나라는 이미 병들어 보전할 수가 없고, 市井은 환란에 횝싸여 琴瑟로 나날을 보내는 안이함에 젖어 경계의 빛이 없었으며, 겉으로는 笙歌不絶하나 속은 다 썩어 있었던 것이다.
III. 결 론
처용이 누구인가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래도 처용의 본질에 우리는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보려고 한다.
먼저 처용가를 그 기본으로 삼고 보면 그는 아내와 외간 남자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는 화가 내지 않고 춤을 추며 물러 나왔다. 다음으로 처용랑과 망해사조로 처용을 보면 그는 동해용으로 대표되는 어떤 세력의 중요한 일원이었다.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 지방의 막강한 호족 세력이거나 외래인이다. 외국인이라는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골품제의 견고성을 보나 귀족들의 세력을 볼 때 왕의 단독의 힘으로 외국인을 높은 관리로 등용하기는 어려웠으리라고 본다. 이재술 정도라면 하급관리를 시켜도 됐을 것이고, 의술을 도리어 주술적 힘이나 불격에 더 의존했으리라고 본다.
또 하나 그가 무당일 가능성이 있는데, 노니다가를 굿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논리이며 그의 춤이 주술적인 것으로 쓰이기는 했지만 연희때 쓰인 것으로 보아 주술적 힘을 지닌 신령한 춤만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처용이 대중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신격화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 역사적 상황에서 처용은 왕을 비롯한 중앙세력들의 반대 입장 즉 민중의 입장에 선 지방호족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요컨데 처용은 동해용으로 대표되는 호족의 아들로서 호족세력과 왕사이의 협상아래에서 왕을 보필하게 되었고 당시의 사회의 부조리와 타락의 현장에서 왕과 중앙세력들을 비판한 인물이였다. 그러므로 처용가는 체념 섞인 비가이며 비판의 노래이다. 이를 민중들이 수용하면서 설화화하였고, 당시의 세계관과 수용의도에 다라 복합적 요소가 결합되어 처용랑과 망해사조는 완성 되었던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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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억 : 「處容歌考」 『한국시가연구』 태학사 1983
김준영 : 「향가문학」 형설 출판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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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연 : 「三國遺史」
김영철 외 「韓國詩歌의 再照明」 형설 출판사
김승걸 : 「鄕歌文學論」 새문사
화경고전문학연구회 : 「향가문학연구」 일지사
최 철 : 「향가의 문학적 해석」 연세대학교 출판부
김학성 : 「處容說話의 變異過程」 『한국민속학 10』 민속학회
황패강 외 2인 : 「향가여요연구」 二友出版社
임기중 : 「신라가요와 기술물의 연구」 二友出版社 1981

키워드

처용가,   신라,   향가,   고대시가,   용왕,   불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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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4.06.11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5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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