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로 본 영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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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나무로 본 영국의 역사


튜터왕조 1485-1606
엘리자베스 1세
초기 스튜어트 왕조 1603-1649
후기 스튜어드 왕조 1660-1714
나무 시대를 벗어나다

■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n Ireland)
지리적 위치
인종
역사
중세시대(초기∼1485년까지)
16세기(1485년∼1603년까지)
17세기(1603년∼1660년까지)
왕정복고시대와 18세기(1660년∼1798년까지)
낭만주의 시대(1798년∼1832년까지)
빅토리아여왕 시대(1832년∼1901년까지)
20세기

본문내용

엘리자베스 튜더 치하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궁정이 국민적인 권위, 영향, 세력, 보상, 그리고 지적인 영감의 중심지였다. 런던은 왕국의 중심지였고 궁정은 움직일 수 없는 런던의 중심지였다. 특히 문학과 예술의 형식은 궁정의 후원을 받고 궁정의 형식을 기본으로, 그리고 궁정인들에 의하여 향유되었다. 그러나 1668년이 지나자 이러한 가치의 패턴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첫째 이제는 더 이상 궁정이 지적인 영향과 문학적 영향의 중심지가 아니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한 사회적이고 재정적인 힘을 궁정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돈과 영향력이 더 이상 궁정으로부터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행과 상인, 도매상, 브로커, 소매상, 그리고 상업신흥소가 망상조직을 이루고 있는 런던시가 세력과 영향력이 흘러 나오는 경쟁적인 원천이 되었다. 보수적인 지주 세력들은 여전히 궁정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으며, 반면에 보다 혁신적인 자본가들은 도시에다 그 주된 토대를 마련하였다. 청교도혁명과 내란으로부터 나타난 한 가지 보편적인 진리는 칼에 의해서든, 기도에 의해서든, 혹은 연구에 의해서든 오직 한 가지 보편적인 진리를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사회는 계급과 획일과 개인적인 관계의 개념에 입각한 사회에서 다수와 부동과 관용의 개념에 입각한 사회로 바뀌었다. 영국은 불과 몇 백년 미만에 문명화되고 부조리한 전제국가에서 활기있고 실리주의적인 다원주의 국가로 옮겨갔던 것이다.
왕정복고시대와 18세기(1660년 1798년까지) 1660년 찰스 스튜어트가 돌아온 영국은 지난 20년 동안의 내란과 혁명에 의하여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던 분열상태의 국가였다. 그러다가 1689년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은 영국의 법치를 확립시켜 주었으며, 1707년의 연합법(Act of Union)은 정치적 동맹을 확립시켜 주었다. 그 정치적 동맹 하에서 영국은 명목상은 물론이고 실제적으로도 가지각색의 배경과 태생을 가진 사람들이 충성을 바칠 의무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국,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동안 토리(Tory)와 휘그(Whig)라고 하는 명확하게 윤곽을 정한 두 개의 정당이 출현하게 되었다. 토리 당원들은 그들의 세력을 주로 토지를 소유한 신사계급과 시골의 성직자들로부터 끌어 모았으며, 그들은 그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었다. 휘그 당원들은 국왕의 권력을 시기하는 많은 유력한 귀족들, 런던의 상인들과 금융가들, 수많은 주교들과 저교회파(Low Church) 목사들, 그리고 국교반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집단들이 종교적 관용과 상업의 지지라는 정책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었다. 17세기가 끝나감에 따라 영국인들의 기질은 보다 세속적이고, 관대하고, 온건하게 되어 갔다. 흔히 18세기를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라고 일컫는데, 이는 상식, 절제, 그리고 합리성의 시대라는 말과 연결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인간의 지력의 한계 내에서 가능한 것들에 기꺼이 만족하고자 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시켜 준 시대였다.
낭만주의 시대(1798년 1832년까지) 이 시기는 정치사적, 경제사적 측면에서 격동의 시기였다. 당시 영국은 부와 권력이 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계급에게 편중되어 있는 농업위주의 사회로부터 경제적 세력균형이 대규모의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가들에게로 옮아가는 근대적 산업국가로 탈바꿈하는 시련을 겪고 있었다. 기업가들은 노동계급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의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일련의 전쟁, 인플레이션, 경제적 악순환, 그리고 해외로부터 수입된 혁명적 이념들이 사회구조에 가하는 끊임없는 위협의 와중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하였다. 프랑스혁명은 그때야말로 전래의 규범과 낡은 폐습을 타파함으로써 모든 것, 다시 말해서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지적, 문화적인 모험의 기도도 가능할 수 있는 새 출발의 위대한 시대라는 느낌을 팽배시켰다.
빅토리아여왕 시대(1832년 1901년까지) 1832년 제1차 선거법이 개정되고, 1837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영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찍 시작한 덕분에 전 세계의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영국산 모직물과 기타 제품 등의 무역으로 얻은 이윤은 자연히 모든 대륙(특히 대영제국의 미개발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자본투자를 낳게 되었고, 그 결과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으며, 런던은 1870년이래 줄곧 세계적인 작업대가 되었다. 영국의 19세기는 맹렬한 활동과 힘찬 변화, 사상의 발효기, 거듭되는 사회적 불안의 시기이고 위대한 창의력과 팽창의 시기였다. 초기의 빅토리아 조는 정치의 부패, 불황과 실업, 어린이의 노동력 착취 등으로 고난의 시기였으며, 중기는 경제적 번영과 종교논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말기는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였던 진지함(earnestness), 체면존중(respectability), 복음주의(Evangelicalism) 등이 붕괴되어 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20세기 19세기의 종말이 가까워짐에 따라 전통적인 안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미주의 운동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함으로써 평범한 중산계급 독자들이 지녔던 예술의 본질 및 기능에 대한 여러 가정들을 의식적으로, 도발적으로 공격하였다. 예술가란 일상적인 사회를 거부하며 또 그것에 의해서 거부된다는 개념과 아울러 인습적인 체면의식에 의해서 붕괴된 한계를 비웃는 보헤미안적인 생활전통의 프랑스에서 유입되었다. 예술가의 소외로 인하여 작가와 독자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으며, 이제 독자는 "고급독자", "중급독자", 그리고 "저급독자"라는 분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또한 양차 세계대전은 사회에 대한 환멸, 전통과의 단절, 정치적 경제적 불안감을 자아냈고, 무기력하고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는 문학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세계대전 후 영국은 주도권을 미국에게 빼앗겼으나 여전히 세계를 움직이도록 만드는 강력한 국가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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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8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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