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수리아 세계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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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팔레스타인-수리아 세계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이스라엘 역사 책 요약

본문내용

자료들에서 발췌한 내용은 양적으로 비록 적긴 하지만 솔로몬 이 죽은 후 유다와 이스라엘의 역사의 경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찰을 가능케 해준다.
- 성경참조
19. 주변국가들과의 싸움
다윗과 솔로몬이 붕괴되면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소국으로 전략하였다. 그들은 이 지역에 있는 다른 세력들과 생존을 위한 싸움을 계속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상황이 변하자 남서쪽으로 블레셋인들이 다시 준동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다윗에 의해 단번에 분쇄된 바 있던 블레셋 세력은 그 후에는 사소한 분쟁만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남서쪽보다 강력한 세력은 한 차례 이스라엘과 유다와 역사에 한동안 개입하였다. 르호보암 왕 재위 제5년 즉, 주전 922-921년에 이집트의 제22 왕조를 창건한 리비아의 용병대장 출신의 파라오 시삭 1세는 한동안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장악하였던 신왕조의 위대한 파라오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또한 시삭의 신왕조의 여러 파라오들이 자신의 원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상부 이집트의 카르낙에 있는 거대한 아문 신전의 벽에 붙여 놓았다던 명단들을 본따서 자신이 팔레스타인에서 정복한 성읍들의 명단을 적어 놓은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 된다. 이 명단에는 유다 성읍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반면 스물일곱번째로 나와 있는 므깃도에 그는 자신이 왔다가 갔다는 문헌 증거를 남기기도 했다.
북동쪽에서 솔로몬 시대에 창건한 다메섹의 아람 왕국은 급속하게 위협적인 세력이 되어갔고, 곡 수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 아람 왕국은 한때 소바의 아람 와 하닷에셀이 통치하였던 광석들이 풍부한 레바논과 안티 레바논 사이의 베카를 장악하고 있었고, 수리아 내륙에 살고 있던 아람인들도 그 지배하에 두었다.
북부 수리아의 알레포 지방에서 아람어로 된 간단한 비문이 새겨진 두로의 신 멜카르트에게 바쳐진 벤하닷1세의 석비가 발견됨으로써 다메석 왕국의 세력의 성격과 판도가 밝혀졌다.
훼손이 많이 된 비문에서 벤하닷은 자신을 타브림몬의 아들이며 하디안의 손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수세대 동안 다스려 왔던‘아람 왕들’의 왕조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북부 수리아에 이르기까지 아람인들을 통치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최초로 위기에 몰아 넣은 장본인이 바로 벤하닷1세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은 이스라엘 내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이러한 상황은 선지에 엘리야에 관한 전승 속에 생생히 나타나 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위에 자신의 이방인 부인들을 위하여 이방 제의들을 위한 성소들을 지어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이세벨은 두로에서 데려온 시종들과 함께 왕도 사마리아에 특별히 지어진 성소에서 도로의 종교 의식을 행하였을 것이다. 이 종교들은 공식적인 국가 제의는 아니었고, 여전히 야훼는 아합 왕과 이스라엘 왕국에게 유일한 이스라엘의 신이었음이 분명하다.
아람인들과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얼마나 어려운 지경에 빠졌는가는 다윗 시대 이래로 이스라엘 왕국에 조공을 바쳐 왔던 모압이 이제 속국 관계를 청산할 때가 드디어 왔다고 보았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왕하 3장 4-5절에 의하면, 모압 왕 메사는 아합이 죽자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한다. 나아가 모압은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과 모압이 그 영유권을 다투어 왔던 아르논 북쪽의 비옥한 고원지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 곳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였고 그 이후로도 대체로 이스라엘 영토로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아르논 북쪽 디본에서 1868년에 발견된 모압왕 메사의 석비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다.
"오랫동안 모압을 압제 하였던(5행)""오므리의 치세와 그의 아들들의 치세의 정반"은 "40년"(8행)이었다고 말한다. 신앗수르 제국이 수리아 팔레스타인을 심가가게 잠식한 사건도 오므리 왕조 시대에 일어났다. 주전 9세기 앗수르 왕조는 세력이 다시 강성해 지기 시작했다.
앗수르의 왕도 칼라(현재의 텔 니므롯)에서 발견된 현무암으로 도니 살만에셀의 오벨리스크(검은 오벨리스크)에는 예후가 조공늘 바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고 그 비문에는 그의 이름이 명기 되어있다. -오므리가의 예후로 명기 됨(앗수르인들은 예후가 오므리가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함)
다메섹에서 하사엘이 아람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이 현무암 조상(彫像)에 새겨있는 명문을 통해 기록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살만에셀이 예후 치세 초기에 하사엘 왕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아람의 위협은 완화되었다. 이때부터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정세는 대체로 앗수르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었다. 살만에셀은 주전 838년에 마지막으로 수리아를 침공하여 다멕섹 땅의 몇몇 성읍들을 함락 시켰다. 그후 그는 여러 차례 원정에도 불구하고 남부 수리아에 왁고한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 채 철군한 뒤에는 더 이상 수리아에 개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람의 세력을 공고히한 하사엘의 위협이 구약전승에서 승승장구한 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전투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주전 800년 앗수르왕 아딧니라리3세는 다멕섹을 진격 아람왕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왕국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여로보암2세는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왕하14:25)의 광범위한 다위과 솔로몬 시대의 국경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앗수르는 다메섹의 세력을 꺾은 후에는 한동안 대규모의 침공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8세기 전반에 일종의 황금기를 구가하였고 유다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두 왕국이 황금기를 누리게 된 것은 앗수르가 다메섹을 제압한 덕분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주전 800년경에 일어난 운명의 변화를 기뻐하며 새로운 번영기를 맞이하였다고 믿고 있는 그 때에, 앗수르라는 거대한 세력이 그 배후에서 불길하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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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8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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