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구제제도와 그 기구 - 진휼제도와 의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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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구제제도와 그 기구 - 진휼제도와 의료제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진휼제도
1) 진휼정책
2) 진휼기구

2. 의료제도
1) 의료시책
2) 의료기구

본문내용

향약에 대한 관심과 이를 이용한 치료법의 개발로 괄목할 만한 향약서가 찬술되었는데, 조선 최초의 향약서는 《향약제생집성방》이었다. 그 다음에 편찬된 것은 《향약채취월령》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약재의 약명·산지·맛·특성 및 건정법을 월별로 기록하여 향약의 이용도를 높이려한 것이다.
현존하는 조선 최고의 향약서는 세종 15년에 85권으로 완성한 《향약집성방》이다. 이 책은 우리 나라의 고유 의서와 중국의서 등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으로서, 조선 초기의 향약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서적이며, 또한 본초학사상 진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다음 종합의서 중 최고의 업적은 《의방유취》의 편찬이다.
이 외에《産書》·《胎産要錄》·《鍼灸擇日編集》·《瘡疹集》 등 전문의서와 구급방·수의서·식품서 등의 편찬으로 다방면에 걸쳐 의학이 발달되었다.
(5)전문의 양성
조선 초에는 의학의 발달과 새로운 의료정책의 시행으로 전문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 최초의 전문의는 침구의로서 세종 20년에 침구전문생 3명을 서용하여 3의사에 배치하는 것으로써 시작되었다. 다른 전문의로는 나력의가 있었다. 이것은 연주장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원으로서 제생원에 속해 있었다. 외과인 치종의도 있었는데 이것은 종기를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원으로 선조 때는 治腫廳까지 설치되기도 하였다.
2) 의료기구
조선 초기의 의료기구로는 중앙에 내의원·전의감·혜민국·제생원·활인원 등이 있었고, 지방에는 의원·의학원·사의국·장의국·의국 등을 설치하여 민간의 질병을 담당하였다.
(1) 3의사
三醫司는 본래 전의감·혜민국·제생원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제생원이 혜민국에 합속한 뒤로는 내의원·전의감·혜민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활인서를 추가하여 四醫司라고도 한다.
가. 내의원
內醫院는 고려의 尙藥局을 계승한 것으로서, 조선 초기에 內藥局 또는 藥局이라 하던 것을 세종 25년 이조의 건의로 내의원이라 개칭하고 정원 16명을 두었다.
내의원은 국왕을 비롯한 왕족의 치료와 어약의 조제가 그 임무였지만, 궁중은 물론 종친 및 2품 이상 고관의 치료도 담당하였다. 내의원 의관은 왕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아 불만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의관의 자질은 3의사 중 가장 우수하였다.
나. 전의감
典醫監은 고려의 典醫寺를 계승한 것으로, 태조 원년에 설치되 것이다. 전의감은 국가 의료기관의 중추적 기관으로서 朝官의 진료·賜與藥材의 관리·약재의 재배와 채취·외국약재의 구입과 판매·민질의 구료·의서편찬·의학교육·취재 등 국가의 의료사업을 모두 관장하였다. 또한 淸心圓·蘇合圓·保命丹 등 구급약의 제조도 전의감의 주요 임무의 하나였다. 이와 같이 전의감은 국가의 중신 의료기구로서 모든 의료업무는 물론 의료정책의 입안과 시행까지도 주관하던 기구였다.
다.혜민서
惠民署는 처음에는 혜민국이라 하던 것으로 고려의 惠民典藥局을 계승한 것이다. 이것은 태조 원년에 설치된 이후 그 직제는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성종 때 완성되었다.
혜민서는 약을 전매하고 서민을 구료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으로 병자의 요청이 있을 대 가서 치료하거나, 활인소·한증소·구료서 등에 의원을 보내 치료를 맡게 하였다.
세조 6년 제생원이 혜민국에 합속되자 기아·고아의 護養과 의녀의 교육도 담당, 민간의 질병치료도 담당하였다.
(2)제생원
濟生院은 고려의 濟危寶와 같은 것으로 태조 6년 8월에 설치되었다. 제생원에는 정부에서 米布를 주어 寶를 삼도록 하였으며 그 이자로 약을 구입하여 가난한 병자를 구하게 하였다. 또 노비를 주어 이들로 사환과 채약인을 삼아 약재를 채납하여 구료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제생원은 병자의 치료만을 담당하던 藥司와는 달리 빈민·행려·환과고독·독질·폐질·실업민과 기아·고아 들을 치료·호양하는 기관이었다.
(3)활인서
活人署는 고려시대의 東西大悲院으로서 조선 초에는 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가 태종 14년 東西活人院으로, 세조 12년 활인서로 개칭하여 병자의 치료와 빈민의 구호를 맡았던 기관이다.
활인원에는 숙소·병동·한증소 등의 치료소가 부설되어 있었는데, 특히 한증소는 질병치료를 위해 매우 중시되었다.
활인원에는 관리·의원·승려·무녀 등이 속해 있으면서 도성 내의 기민과 병자를 구료하였다. 활인원은 원래 예조 소속이지만 주로 도성 내의 사람들을 구휼하였기 때문에 한성부와 사헌부의 감찰을 받기도 하였다.
(4 )지방의 의료기구
가. 의료기구의 설치와 운영
조선시대에도 지방에 의료기구가 설치되어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조선 최초의 지방 의료기구는 醫院이었는데, 이 의원에서는 의생을 교육하였고 교수관에게는 또 채약정부를 속하게 하여 약재를 채취, 이것으로 백성의 지리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각 도에 배치돈 醫學敎諭는 지방의료의 중심적 존재로서 의생교육 그리고 관리와 백성의 병치료는 물론, 약재의 채취와 건정 및 조제까지도 담당하였다. 한편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이들만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3의사의 의관이 파견되어 치료하였다.
나. 민간의료
질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의원이 행하는 침구와 약물치료 이외에 민간요법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받은 한증욕·온천욕 등의 목욕치료법을 비롯하여 확실한 효과가 있는 민간의 비방 및 효력이 뛰어난 약수 등이 그러한 것이라 하겠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의료기구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이를 더욱 확대·정비함으로써 백성에 대한 의료시혜의 폭을 더욱 넓혔던 것이다. 특히 활인원의 기능은 고려시대보다 더욱 다양해져 도성내의 병자를 치료함으로써, 국립 의료기구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여러 의료기구가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그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했던 것은, 역대 국왕을 비롯한 위정자의 지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
1. 임영태 외, 거꾸로 읽는 한국사, 푸른나무, 2002.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1996.
3. 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청년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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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04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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