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처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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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가,처용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신라가요(新羅歌謠)=향가(鄕歌) 일반론(一般論)

1. 명칭

2. 개관

3. 갈래

4. 형식

5. 작자

6. 내용과 수사

※ 향가의 작품세계

신라가요(향가)의 이해

1. 향가의 발전

<서동요>의 이해

(1) 서동요(薯童謠) : 백제 무왕

(2) 헌화가(獻花歌): 견우노인

(3)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4) 처용가(處容歌) : 처용

(5)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본문내용

동해용의 조화이오니, 무슨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소관 관리에게 칙령을 내려서 용을 위하여 그 근처에 한 절을 세우게 하기로 하였는데, 이 칙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다 개었다. 그래서 거기를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다.
동해의 용은 기뻐서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송하여 노래하고, 음악을 올리며 춤을 추고, 그 한 아들을 왕께 주었다. 함께 서울에 와서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 용의 아들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을 오래 멈추어 두기 위해서 미녀를 골라 아내를 삼게 하고, 또 급간 벼슬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절세의 미인임으로 역신이 그를 흠모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변신을 하고, 어떤 날 밤 그의 집에 이르러서 몰래 함께 자고 있었다. 처용은 바깥에 나갔다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둘이서 함께 자고 있는 지라 자기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그 곳을 물러갔다. 이 때에 역신은 모양을 나타내고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여워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의 화상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이로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화상을 문간에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벽사 진경: 僻邪進慶)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지금의 울산에 있는 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망해사 또는 신방사라 하였으니 용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3) 연구
(1)처용(處容)
동해 용왕의 일곱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체는 알 수 없고 학자간의 의견도 구구하다. '처용가'가 처용희(處容戱)로 불리었다는 점에서 처용은 작자라기보다 처용의 역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 사람인지도 모른다.
(2)처용희(處容戱)
신라·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계속 전승되어 온 구나의식무(驅儺儀式舞)이면서 연극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가면을 쓰고 잡귀를 물리치는 것은 구나 의식의 보편적인 방식의 하나이며, 부락 굿에서도 그러한 예를 흔히 찾을 수 있다. 처용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며,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고 역신과 대결한다는 점에서는 처용희를 연극이라고 말한다. 굿에서 연극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처용회의 근본적 성격이었으나,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이 복합되어 실제 공연하던 처용희를 이루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처용희는 용신, 산신, 불교의 의식의 복합이고, `악학궤범'에 전하는 처용희는 처용이 오방(五方) 처용으로 되어 연화무학무(蓮花舞鶴舞)와 복합되어 있으며, 여기(女妓)가 처용가에 있어서 봉황음 삼진작(鳳凰吟 三眞勺) 등의 다른 노래를 하도록 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의 처용희는 주로 궁중에서 거행되는 세말(歲末)의 나례에서 공연되었으나, 민간의 처용회도 있었다. 의식무로서의 기능이 유지되기는 했으나, 놀이로서의 성격이 확대되었다. 영조 이후에는 중단되었다가 1920년대에 `악학궤범'에 의거해서 다시 시작해 오늘날에 전한다.
(3)한국의 인형
한국의 인형을 고증할 자료는 없다. 그러나 신라의 고분(古墳)에서 발굴된 유물 속에는 인형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토우(土偶)가 있다. 점토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모자 같은 것을 씌웠거나 말을 탄 모습으로도 만들었다. 이러한 토우들은 부장품(副葬品)으로 만들어넣은 것이다. 이로써 당시에 흙인형이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따라서 한국 인형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밖에 풀인형인 풀각시가 있었으며, 질기고 가는 파란 풀을 손가락만한 나뭇가지에 실로 동여매고 세 가닥으로 땋아 머리 모양을 만들고 색헝겊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만들어 입혔다. 또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제웅’이라 부르고, 1년 동안의 액을 때우는 세시풍속(歲時風俗)이 있었다. 이것은 민간신앙과 인형이 연결되어 주술적인 기능을 나타냈던 예이다.
이것이 후에 무당이나 점장이에게는 신(神)으로 모셔졌고, 한편 단순한 오락으로 발달한 것에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인형극 ‘만석중놀이’와 ‘꼭두각시놀음’이 있다. 연기자가 막 뒤에 숨어서 인형을 조종하여 극적인 효과를 나타냈으며, 이러한 인형들은 모양의 아름다움보다 성격적이며 개성적인 면이 두드러지도록 만들어졌다.
근대에 와서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아 실내장식을 위주로 한 아름다운 인형을 만드는 경향이 짙어짐으로써 소박하고 상징적인 것보다는 사실적인 것을 주로 만들게 되었다.
7. 향가 "처용가"와 고려가요 "처용가"의 비교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고려 속요 '처용가'에 향가 '처용가' 중 6구가 다음과 같이 한글로 옮겨 있어 향찰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1) 속악가사와 고려가요
학자에 따라서 고려 시대의 노래를 고려가요 혹은 고려속요라 하기도 하고 속악가사라 하기도 한다. 고려가요라는 명칭은 단순히 '고려시대의 노래'란 뜻이 담겨 있고, 고려속요라는 명칭은 노래의 성격을 뜻한다. 즉 별로 우아하지 않은, 속된 노래란 뜻이다.
속악가사라는 명칭은 <고려사> 악지(樂誌)에 고려 시대 노래를 아악(雅樂), 당악(唐樂), 속악(俗樂)으로 분류해 놓은 구분에 따른 것으로, 아악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란 뜻이고, 당악은 당나라에서 들어온 것, 속악은 국내에서 생긴 노래라는 뜻이다.
2) 향가 "처용가"와 고려가요 "처용가"
위의 자료들을 참조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고려 시대의 "처용가"는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변모는 원래 향가인 "처용가"가 주술적 효력을 발휘해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을 발휘하자, 그것을 전승시킨 무당들이 굿이라는 행사에 적합하도록 길게 고쳤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3)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는 고려에 와서 궁중의 나례(儺禮-잡귀를 쫓기 위한 의식)와 결부되어 '처용희(處容戱)', '처용무(處容舞)'로 발전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제야(除夜)에 구나례(驅儺禮)를 행한 뒤 두 번 처용무를 연주하여, 그 가무(歌舞)와 노래가 질병을 몰아내는 주술적(呪術的) 양식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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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10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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