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구의 도입과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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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농구의 역사
2. 근대 체육의 도입
3. 한국 농구의 태동
4. 중등 농구의 발전
5. 대학농구의 시작
6. 조선농구협회의 창립
7. 한국 농구의 활약
8. 농구의 대중화
9. 농구대잔치
10. 프로농구

본문내용

와서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라는 대회참가 주장이 한국선수단 안에서도 제기되었다. 일본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상백의 태도는 완강하여 국내에서의 '참가론'과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참가권고론'을 단호하게 묵살하였다. 결국 우리 선수단만은 육상종목에 참가를 포기하여야만 하였다. 자카르타에 모인 외신기자들은 한국의 육상경기 포기결정이 '현명한 그리고 용기있는 결정'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본 기자들도 한국의 결정을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보도하면서 일본의 대회참가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결단의 정당성은 후일에 뚜렷하게 증명되었다. 뒤에 I A F집행위원회는 한국의 용기 있는 결정을 치하했고, A G F와 I O C의 임원들까지 한국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였다. 일본은 공인 받지 못한 육상경기에 선수를 참가시킨 지도층의 적절하지 못한 판단으로 국내외의 지탄을 받았고 올림픽관계자들이 총사퇴 하는 수난을 당하였다. 당시 도쿄올림픽을 앞둔 일본에서는 국회에서조차 이 사건의 진상이 논의되었고, 이상백의 현명한 결정의 예를 들어 일본 지도자들을 비판했다.
A G F총회는 자유중국과 이스라엘의 대회참가를 거부함으로써 A G F헌장을 위반한 자카르타대회를 공인할 것인가. 또 이 대회를 조직한 인도네시아가 헌장을 위배한 데 대한 처벌 문제 등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이상백을 진상조사위원으로 지명했다. 그는 진상보고서에서 자카르타조직위원회의 책임문제와A G F의 불상사에 대한 대비책의 미흡, 그리고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특성, 특히 국제경기에 있어서 정치의 압력 문제를 배제할 수 없는 아시아 후진국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을 실증적이면서도 예리하게 분석, 대회는 미흡하지만 '공식성립'을 A G F와 I O C에 건의하였다. 이 보고서로 인하여 제 4회 자카르타 대회는 공인되었고 자칫 아시아경기대회는 「영원한 전진-Ever Onward」라는 표어에 반하여 중단되거나 와해되는 위기를 현명하게 넘겼고, 「한국의 이상백박사」라는 세계적인 스포츠 지도자가 아시아에 있음을 다시금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백은 1948년 K O C(대한올림픽위원회)총무, 195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52년 헬싱키올림픽 한국대표단 총감독, 1956년 멜보른올림픽 및 1960년 로마올림픽 한국 대표단단장, 그리고 1960년에 K O C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64년에는 K O C위원장이 되어 우리나라 체육의 국제사회 진출과 지위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한국올림픽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준 위대한 체육인이었다. 1954년에는 아시아경기연맹(A G F, 현 O C A의 전신)의 집행위원으로 아시아 스포츠계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4년 도쿄에서 열린 I O C총회는 이상백을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국제올림픽위원회(I O C)의 종신회원으로 선출하였다.
이상백이 남긴 국제체육계에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66년 A G F는 「SANG-BECK LEE CUP」을 제정하고, 1974년 제 7회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부터 최우수선수에게 시상하여 오고 있다. 또한 1976년 선생의 10주기를 맞이하여 한국과 일본농구협회는 양국 체육계의 선각자이며 농구계의 은인인 이상백박사의 위대한 업적을 추모하여 「李相佰盃」를 제정하고 매년「한·일대학선발농구경기대회」승자에게 이상백배를 수여하고 있다.
李相佰盃 韓日大學選拔籠球競技大會(이상백배 한일대학선발농구경기대회)
한·일양국 농구계의 은인이신 이상백박사는 문무를 겸비한 위대한 인물로서 농구선수를 거쳐 농구지도자, 농구지도서 저술, 일본농구협회 창설,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 농구연맹의 창설과 농구가 올림픽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K O C위원장, I O C종신위원 등 요직을 거치면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국제적 체육인이였다. 농구에 국한하여 살펴보면 이상백박사는 탁월한 영어실력을 구사하여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하였던 와세다대학 농구팀을 인솔 미국을 원정하였으며 미국 본바탕 농구를 동양인의 체질에 맞게 연구 보급하였다. 농구 이론으로도 제 1인자였으며 농구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농구 지도서인「농구의 이론과 실제」는 당시의 농구 지도자에게 바이블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본 각지의 요청에 의하여 강습회를 가진 일도 수없이 많았다.
한편 일본 와세다대학 연구원에서 동양사회학 연구, 2년반 중국에서의 연구활동,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박물관장, 진단학회 회장, 사회학회 회장, 국사편찬위원, 고등고시위원, 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한 한국의 사회학과 역사학의 거물이기도 하였다. 사회학 및 역사학에 관한 6권의 저서와 5권의 역서, 50여편의 귀중한 논문을 남겼으며 그밖에도 수필, 기행문, 서평 등을 남겼습니다. 그가 소장했던 7천 6백여권의 책들은 서울대 도서관에 기증되어「상백문고」로 보관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희귀본도 상당히 많다. 특히 자신이 박물관장을 역임한 바 있는 서울대 박물관에 국보급 은한 대(殷漢代)의 갑골문자편(甲骨文字片) 12편(片)과 고대중국유품(古代中國遺品) 34점(點)신라토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유품(遺品) 22점 등 56점을 기증하였다. 이 국보급 기증품은 해방 3-4년전 중국 북부와 중부 등 여러 곳을 여행하며 수집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위대한 활동과 업적을 남긴 이상백박사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의 농구계 원로들이 이상백박사 10주기를 맞아 도쿄에서 모여 다음과 같은 취지문과 함께「이상백배한일대학선발농구경기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농구는 다른 어느 구기 종목보다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세계에 한국의 명예를 알리는 국위 선양의 역할도 수행해 왔다.
◎ 참고문헌
①최신 농구교본-삼성 김현준 감독(국일 미디어),
②농구-정성태(교학사)
③이야기 한국 체육사: 농구-조동표(서울 올림픽 기념 국민 체육 진흥 공단)
④점프볼 11월호 박정우기자
◎참고자료
http://cyber.chongju.ac.kr
www.naver.com
http://www.kbl.or.kr/
http://www.wkbl.or.kr/
  • 가격3,000
  • 페이지수24페이지
  • 등록일2004.09.11
  • 저작시기2004.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6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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