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꼬뱅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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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쟈꼬뱅 클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문

Ⅱ. 쟈꼬뱅 클럽

1. 브르통 클럽

2. 쟈꼬뱅 클럽

3. 페이양 분열

1) 페이양파
2) 브리소파
3) 그 외

4. 지롱드 숙청

1) 지롱드와 산악파의 분열
2) 지롱드의 몰락

5. 활동

6. 공포정치시기

7. 코르들리에 클럽

1) 창설과 활동
2) 갈등과 몰락

Ⅲ. 결론

본문내용

다. 그들의 목적은 감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조사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감옥에서 박해받은 애국자들을 찾아가고 조사를 하고 가입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청원과 시위를 하고 필요할 때는 폭동을 일으켰다. 한 달에 2쑤라는 매우 낮은 회비 덕분에 그들은 쁘띠 부르조아 계급 사이에서, 심지어는 선거인 자격에 관한 납세액 규정에 미달하는 사람들인 수동적'시민 사이에서까지 회원을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 그들은 필요한 경우에 대중을 선동하여 분기시킬 수 있었다.
코르들리에파는 곧 다른 구에 있는 클럽들의 뒷받침을 받았다. 이런 클럽 중 다수는 1790년에서 1791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에 우애단체 또는 민중단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끌로드 당싸르가 창설한 최초의 지구 클럽은 자꼬뱅 수도원의 한 홀에서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는 헌정동지회가 이미 회의를 열고 있었다. 당싸르는 가난한 상인들과 육체노동자들의 집회를 열고는 제헌의회의 명령을 그들에게 읽고 해설했다. 마라는 비천한 민중을 위한 이 클럽들이 민주주의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클럽의 결성을 고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침내 빠리의 각 구마다 한 개씩의 클럽이 생겼다. 대중의 정치교육이 행해지고 민중의 대부대가 모집되어 조직된 것은 이 클럽들을 통해서였다. 이 클럽들의 창설자인 딸리앙(Jean Tallien. 1767- 1820), 떼에 라뚜쉬, 르봐, 쎄르장, 꽁스디외 당주 신부 등은 모두 코르들리에파였다. 그들은 공포정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분간 그들은 라파예뜨, 반항사제 및 궁정에 대한 민주파의 투쟁을 전력 지원했다. 장 자끄 루소로부터 원용한 그들의 사상은 직접통치사상이었다. 그들은 헌법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법률까지도 인민의 승인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귀족과 성직자의 과두정치를 대신한 정치인의 과두정치에 대한 불신을 표현했다. 그들은 제헌의회가 새 헌법을 인민의 지배 아래 두고 있지 않으며 헌법개정에 대해 장애물을 세웠다고 비난했다.
2) 갈등과 몰락
문제는 공포정치 시기에 코뮌에서나 섹션에서 반혁명파나 혐의자 색출 등에 열성을 보인 자들이 바로 코르들리에 클럽을 지지하는 과격파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소유의 평등을 주장하였으며, 민중에 의해 다스려지는 직접민주정을 옹호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정부수립을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였고, 지나친 열정으로 민주정에 대한 선례를 가지지도 못한 상태에서 너무 서둘러 그 목적을 이루려 하였던 것 같다. 그들이 계속 과격해지자 민중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즐겼던 쟈꼬뱅은 결국 그들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흔히 인식하고 있듯 산악파-쟈꼬뱅이 공화국에 대해 그들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는 없다. 물론 쟈꼬뱅은 그들과 달리 사유재산에 바탕을 둔 그리고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대의제 민주제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보다는 그들이 중도좌파였기 때문에 에베르파 등의 극단적인 행동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을 처벌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코르들리에 클럽을 '부도덕한 자들의 광신주의'라 여기고 과격파를 제거하였으며,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던 섹션의 클럽들을 경계하였다. 즉 그들은 민중정부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극단론자를 포기하였던 것이다.
쟈꼬뱅 클럽은 혁명의 촉진을 위해 정부의 일에 협조한 만큼, 그들은 정부나 지방행정기관에 대해 압력수단으로 기능하였다는 사실도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마르세이유 클럽의 경우 그들은 정부에 충실을 기하면서도 공포정치 동안 여전히 대중의식에 대해 열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정부기관에 대해 계속적인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감시, 비판의 기능도 담당하였던 것이다. 마르세이유 클럽은 혁명시기 내내 중요한 쟈꼬뱅 클럽의 하나로 로베스피에르의 찬사를 들었으며 지역적 자부심 또한 강하였다. 식량보급 등의 자체적 계획구상과 고기값 인하를 위한 기금을 마련했던 클럽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쟈꼬뱅 클럽이 정부의 공식적 기관으로 거의 인정되었으며, 제 1 공화국을 수립한 토대였던 만큼 정부의 일에 협조한 면모도 있지만, 그것을 완전히 '조작기구'로 매도함은 그 당시 쟈꼬뱅 클럽이 처했던 상황이나, 쟈꼬뱅 클럽 조직망 내에 여전히 살아있는 자율성이라든가 감시.비판기능을 외면해버린 결과라 인식된다.
Ⅲ. 결론
다시 한번 쟈꼬뱅 클럽의 위치를 정의해보면, 사실상 혁명을 주도하고 진전시킨 것은 거의 쟈꼬뱅 클럽의 역할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우선 수많은 대중을 정치에 참가시켜 왕정을 유일한 정부형태로 알고 있던 프랑스에서 공화제 수립의 기반세력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물론 훗날의 일이지만 테르미도르 9월 이후 혁명이 다시 보수화되고 쟈꼬뱅 클럽마저 몰락한 것은 어느 면에서는 그들 기반이 든든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여전히 좌파로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과 그들 정신의 부분이 20세기까지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19세기 내내 비난에 시달렸지만 20세기에는 재평가를 받고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대체로 프랑스에서는 많은 사가들이 1793년의 쟈꼬뱅 혁명을 군주정의 유산속에서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로서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쟈꼬뱅조직은 단순한 조작기구나 전체주의 조직의 원형만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그 안에는 근대적인 정당의 원초적인 형태와 조직, 방법, 이데올로기의 형태가 있었다. 비록 비타협성으로 인한 경직성과 극단적인 요소들은 미숙함을 드러내지만, 소외되었던 민중을 앞세우고 혁명의 가운데에 서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쟈꼬뱅은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참고도서
알베르 마띠에 저, 김종철 역, 프랑스 혁명사 上ㆍ下,
창작과 비평사, 1982
알베르 소부울 저, 최갑수 역, 프랑스 대혁명사 上ㆍ下,
도서출판 두레, 1984
노명식 저,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1789-1871,
도서출판 까치, 1980
고 성임, 프랑스 혁명기 쟈꼬뱅 클럽에 관한 고찰(1789-1794),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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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4.09.23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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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8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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