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의 편찬과 구성 및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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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사의 편찬과 구성 및 내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目 次 〗

1. 머리말
2. 고려사 편찬과정과 개수의 원인
3. 편찬자들과 편찬원칙
4. 고려사 구성 및 내용 및 사관
5. 고려사에 대한 평가 및 사료적 가치
6. 맺음말

본문내용

면도 있겠으나, 관찬사서 편찬에 개입하는 지배층의 정치적 동기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전체는 열전을 통해 신민의 활동을 역사 속에서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거니와, 그것이 신료들이 기전체를 주장한 또 다른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고려사』의 전반적인 내용이 군주 쪽에 비중을 둔 것은 세종의 주장에 좀더 비중을 두고 절충된 결과로 해석되며, 후에 『고려사 절요』에서는 신료들의 활동에 대한 비중을 확대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註 3)와 同
『고려사』는 그 편찬은 세종과 같은 영주(英主)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그 전후의 조선전기 역사서들과 다른 뛰어난 측면이 있다. 성리학적인 이념에 투철한 것이 진리와 정의의 실천방법이고 그에 어긋나는 것은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논리가 횡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세종의 주장과 같은, 사실의 존중을 내세운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겸허한 접근이 일부나마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전기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고려사』가 고려시대의 사료집으로서 만족스럽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려사』편찬자들의 근본입장에 따르는 편찬태도는 때로 사료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도하며, 지배층 중심으로 선택된 사료이기에 대개는 피지배층 내지 하층민의 동향은 역사서술에서 사실상 거의 배제되었다. 역사의 서술대상은 왕실과 지배층이 중심이 된 왕조였고, 그 왕조의 흥망과정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유교적 문치주의 이념에 따라 지배층 중에서도 왕실과 함께 문신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또한, 고려초기의 부분이 너무 소략화 된 것은 거란 침입으로 인한 사적(史籍)의 손실에 말미암은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다. 연대까지도 분명한 광종의 노비안검이 세가(世家)에 빠져 있으며, 지(志)에는 연대의 표시가 없는 것도 있다.
註 12)와 同
원래 기록이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일정한 시대에, 일정한 사람들의, 일정한 목적의식 하에서 작성되는 것 인만큼, 그 나름의 제약이 있게 마련이다. 『고려사』는 원래의 사료를 재편집한 것이므로 이중적으로 그러한 제약을 받는 셈이다. 이러한 것은 열전(列傳)의 경우에, 석로전(釋老傳)이 정치적으로 관계된 승려들 4명에 국한되었다는 한계를 갖게 하였다. 고려사회에서 불교의 비중이 원에 비해 현저히 컸다는 점을 고려하면 석로전을 아예 제외한 것은 중대한 결함이 있다. 『고려사』에 풍수지리의 관계된 자료가 채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志)의 경우에 있어서도 『원사』를 따른 지의 형식은 전통적 요소를 바탕으로 당송제(唐宋制)를 수용한 고려의 제도는 원의 제도와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제도를 기술함에 부적합한 면도 있다. 조선 초기 유학자들이 원을 이적시(夷狄視)하고 원에 사대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면서도 고려사를 원사에 준하여 편찬하였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史臣)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당시의 현실과 조선초기의 편찬자의 역사의식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있었으며, 이러한 역사의식의 차이는『고려사』의 편찬에 있어서 한계를 갖게 하였다.
6. 맺음말
이상으로『고려사』의 편찬과정과 장기간에 걸쳐 개찬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개수의 원인 및 『고려사』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과 세종을 통해 편찬 원칙을 알아보았다. 또한,『고려사』의 구체적인 구성과 내용 및 사관(史觀)을 통하여 이 글에서,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던 역사서로서 지니는 의의 및 그 한계를 통하여 사료적 가치도 알아보았다.
『고려사』는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졌다. 직서주의와 기록보전주의의 중립적 관점의 편찬 원칙에 따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려의 역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할 수 있다. 편찬에 참여한 사학자들이 유교주의에 젖어 있어 관념과잉(觀念過剩)에서 오는 냉정성을 잃은 대목들이 있으나, 이것은 조선 초기 문화에 대한 비판이 정립되지 못한 데서 온 하나의 과오이다. 『고려사』가 이러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려왕조의 역대 『실록』을 대할 수 없으며 고려 때 편찬된 『사략(史略)』『금경록(金鏡錄)』등의 고려사서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사료로서『고려사』가 지니는 의의는 막중하다. 또한 시대를 전폭적으로 이해 · 정리하려 한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즉, 조선초기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할 때, 『고려사』는 당시의 사학으로서 뛰어난 면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초기의 시대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인 한계와 더불어 편찬자들의 역사관에 따른 서술대상과 자료의 선정과 관련된 문제로서 고려시대의 역사상의 구조적인 윤곽을 이해하는 데 제약을 주었다는 한계도 주목해야 한다.
♣ 참고 문헌 ♣
한영우,「15세기 관찬 사서 편찬의 추이」,『조선전기사학사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81
조동걸 한영우 박찬승,「고려사 고려사절요」,『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上), 창작과 비평사, 1995.
김근수, 『고려사 해제』,한국사14, 1977.
이기백, 「고려사 해제」,『한국의 역사인식』(上) , 창작과 비평사, 1992.
변태섭, 『고려사 탐구』, 삼영사, 1982.
변태섭, 「고려사의 종합적 검토」, 한국사학4, 정신문화연구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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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10.04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9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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