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세계
맑은 새벽 목욕을 겨우 마치고 淸晨罷浴
거울 앞에 앉아서 몸 가누지 못하네. 臨鏡力不持
천연스레 너무나 고운 그 모습 天然無限美
화장하지 않았을 때 더욱 어여뻐. 摠在未粧時
최해의 <풍하風荷>란 작품이다. 유물급인(由物及人)하는 연상과 교묘한 암유가 담겨 있다. 이른 아침 물을 덥혀 목욕을 마친 아가씨는 단장을 하려고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치는 갓 목욕한 함초롬히 젖은 살결과 촉촉한 머릿결은 마치 연못 위로 봉긋 꽃망울을 터뜨린 연꽃의 환한 아름다움을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작품의 제목은 연꽃이고, 시의 내용은 목욕 후에 거울 앞에 앉은 여인의 모습이다.
장흥동 어귀에서 헤어지고는 長興洞裏初分手
승학교 다리께서 애를 끊누나. 乘鶴橋邊暗斷魂
헤어진 뒤 저물녘 방초길에서 芳草夕陽離別後
진 꽃잎 볼 적마다 우리 님 생각. 落花何處不思君
권붕의 여종 금가(琴歌)의 시이다. 제목은 <이별>이다. 불과 조금 전에 장흥동 어귀에서 님고 헤어졌던 그녀는 근처 승학교를 건너며 벌써 그리움에 애가 끊어진다.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어도 그리운 것이 사랑이라고 했던가. 사랑에 겨운 봄날의 한때를 보내고 난 꽃잎들이 분분히 지고 있다.
어찌 월하노인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那將月老訴冥府
내세에는 우리부부 역할을 바꾸어 來世夫妻易地爲
나 죽고 그대만이 천리밖에 살아남아 我死君生千里外
그대에게 이 슬픔 알게 할까 使君知有此心悲
김정희의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이다. 이 시는 추사가 만년 제주도에 유배 갔을 당시 지은 시이다. 절해고도 제주도에서 실의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늙고 병든 노정객에게 아내의 부고가 날아왔다. 오랜 세월 부부의 인연으로 지냈던 나날들. 자신의 귀양 소식에 아내는 얼마나 낙담하고 절망했던가. 끝내 그 절망을 지우지 못하고 아내는 그렇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작 평생을 함께 보낸 아내의 죽음에 가서 곡 한 번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는 기가 막히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하다. 오죽 아내의 죽음이 안타까우면 월하노인을 통해 저승에 하소연 하고자 할까. 늙은 노정객의 비통한 마음이 싯구 절절히 묻어나와 읽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하는 슬프디 슬픈 시이다.
이상 사랑을 주제로 한 정시 몇 수를 감상해보았다.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어째서 이렇게 슬픔에 푹 젖어 가라앉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 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그리움이건, 이별이건, 새로운 만남이건, 사랑에 관한 인간의 정서를 노래한 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자극한다. 이것이 인류가 시를 짓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스물네번째 이야기 - 그때의 지금인 옛날 : 한시 전통의 미학 의의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이 있고, 형식적 틀이 있다. 새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것이 새것 다우려면 옛것을 변화시키는 통변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옛것을 새것이 되게 하는가? 어찌하면 드넓게 터진 길을 통쾌하게 내달릴 수 있을까? 마르지 않는 샘물에 목을 적실까? 그 길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으니 저마다 마음으로 깨달을 뿐 누가 일러줄 수가 없다.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팔 일이다.
오늘날 한시에 대한 관심은 한갓 회고 취미나 골동품을 완상하는 호사는 아닌가? 더 이상 한시를 짓는 전문 시인이 배출되지 않는 현실에서 한시에 관한 담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국문학과의 교과과정을 보면 현대시론이나 현대소설론, 현대비평론 등의 강좌는 있어도, 한국시론이나 한국소설론, 한국비평론 등의 강좌는 찾아볼 수 없다. 시론과 비평론은 ‘현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서구의 문예이론을 전달한다. 독일문학비평사와 프랑스문학비평사, 중국문학비평사는 서점에 버젓이 꽂혀 있는데, 정작 볼 만한 한국문학비평사는 한 권이 없다. 고작해야 그간 비평주제로 쓴 논문을 모아 엮은 것이 전부다.
우리에게 고급한 문예이론이 없었던가? 우리에게 깊이 있는 미학의 체계가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 그것은 해독되지 않는 파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누구를 탓할 겨를도 없다. 옛것을 오늘에 호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야말로 정말 요긴한 것이 아닐까? 저 한유의 ‘사기의 불사기사’의 정신을 환기한다면, 우리가 한시를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샘물은 무궁무진하다. 기갈에 바짝 타는 목을 축이고 더위에 찌든 몸에 상쾌한 등목을 해줄 수 있다. 가야 할 미지의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척으로 된 선인들의 이야기를 센티 자를 들이대어 재려고만 하니, 옛사람들은 길이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게 된다. 눈금을 호환해 읽을 생각은 않고, 연구자들은 문화의 차이나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최신의 서구 이론을 무작정 대입하는 연구를 낸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척으로 설명하겠다고 나선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그 이야기는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한시 연구에서 논문을 쓰자는 것인지 위인전을 쓰고 있는 것인지 분간 안 되는 연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애나 역사 배경을 주욱 늘어놓고, 거기에 작품을 꿰어 맞춰 일대기적 구성으로 재배열하거나, 자기가 연구하는 시인이 언제나 최고가 되는 당착은 고치기 힘든 병폐가 된 지 오래다. 툭하면 현실인식이고, 입만 열면 역사의식을 말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학성이 담보되지 않은 의식이란 대자보나 설교와 무엇이 다른가? 미의식의 부재는 문학성의 검증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가뜩이나 한문해독의 부담을 지고 가는 터에 미학의 잣대마저 흔들리니, 이번에는 아예 인치를 가지고 자척을 재려드는 격이 되고 만다.
우리야말로 ‘눈뜬 장님’이 아니었던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서구의 빛깔과 형상에 망상을 일으켜, 어느 골목이 바른 골목인지, 어느 대문이 제 집인지도 모르고 길가에서 망연자실 울고 있는 눈뜬 장님이 아니었던가? 아니 우리는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울고 서 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눈뜬 장님은 아니었던가?
맑은 새벽 목욕을 겨우 마치고 淸晨罷浴
거울 앞에 앉아서 몸 가누지 못하네. 臨鏡力不持
천연스레 너무나 고운 그 모습 天然無限美
화장하지 않았을 때 더욱 어여뻐. 摠在未粧時
최해의 <풍하風荷>란 작품이다. 유물급인(由物及人)하는 연상과 교묘한 암유가 담겨 있다. 이른 아침 물을 덥혀 목욕을 마친 아가씨는 단장을 하려고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치는 갓 목욕한 함초롬히 젖은 살결과 촉촉한 머릿결은 마치 연못 위로 봉긋 꽃망울을 터뜨린 연꽃의 환한 아름다움을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작품의 제목은 연꽃이고, 시의 내용은 목욕 후에 거울 앞에 앉은 여인의 모습이다.
장흥동 어귀에서 헤어지고는 長興洞裏初分手
승학교 다리께서 애를 끊누나. 乘鶴橋邊暗斷魂
헤어진 뒤 저물녘 방초길에서 芳草夕陽離別後
진 꽃잎 볼 적마다 우리 님 생각. 落花何處不思君
권붕의 여종 금가(琴歌)의 시이다. 제목은 <이별>이다. 불과 조금 전에 장흥동 어귀에서 님고 헤어졌던 그녀는 근처 승학교를 건너며 벌써 그리움에 애가 끊어진다.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어도 그리운 것이 사랑이라고 했던가. 사랑에 겨운 봄날의 한때를 보내고 난 꽃잎들이 분분히 지고 있다.
어찌 월하노인 통해 저승에 하소연해 那將月老訴冥府
내세에는 우리부부 역할을 바꾸어 來世夫妻易地爲
나 죽고 그대만이 천리밖에 살아남아 我死君生千里外
그대에게 이 슬픔 알게 할까 使君知有此心悲
김정희의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이다. 이 시는 추사가 만년 제주도에 유배 갔을 당시 지은 시이다. 절해고도 제주도에서 실의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늙고 병든 노정객에게 아내의 부고가 날아왔다. 오랜 세월 부부의 인연으로 지냈던 나날들. 자신의 귀양 소식에 아내는 얼마나 낙담하고 절망했던가. 끝내 그 절망을 지우지 못하고 아내는 그렇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작 평생을 함께 보낸 아내의 죽음에 가서 곡 한 번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는 기가 막히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하다. 오죽 아내의 죽음이 안타까우면 월하노인을 통해 저승에 하소연 하고자 할까. 늙은 노정객의 비통한 마음이 싯구 절절히 묻어나와 읽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하는 슬프디 슬픈 시이다.
이상 사랑을 주제로 한 정시 몇 수를 감상해보았다.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어째서 이렇게 슬픔에 푹 젖어 가라앉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 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그리움이건, 이별이건, 새로운 만남이건, 사랑에 관한 인간의 정서를 노래한 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자극한다. 이것이 인류가 시를 짓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스물네번째 이야기 - 그때의 지금인 옛날 : 한시 전통의 미학 의의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이 있고, 형식적 틀이 있다. 새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것이 새것 다우려면 옛것을 변화시키는 통변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옛것을 새것이 되게 하는가? 어찌하면 드넓게 터진 길을 통쾌하게 내달릴 수 있을까? 마르지 않는 샘물에 목을 적실까? 그 길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으니 저마다 마음으로 깨달을 뿐 누가 일러줄 수가 없다.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팔 일이다.
오늘날 한시에 대한 관심은 한갓 회고 취미나 골동품을 완상하는 호사는 아닌가? 더 이상 한시를 짓는 전문 시인이 배출되지 않는 현실에서 한시에 관한 담론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국문학과의 교과과정을 보면 현대시론이나 현대소설론, 현대비평론 등의 강좌는 있어도, 한국시론이나 한국소설론, 한국비평론 등의 강좌는 찾아볼 수 없다. 시론과 비평론은 ‘현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서구의 문예이론을 전달한다. 독일문학비평사와 프랑스문학비평사, 중국문학비평사는 서점에 버젓이 꽂혀 있는데, 정작 볼 만한 한국문학비평사는 한 권이 없다. 고작해야 그간 비평주제로 쓴 논문을 모아 엮은 것이 전부다.
우리에게 고급한 문예이론이 없었던가? 우리에게 깊이 있는 미학의 체계가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 그것은 해독되지 않는 파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누구를 탓할 겨를도 없다. 옛것을 오늘에 호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야말로 정말 요긴한 것이 아닐까? 저 한유의 ‘사기의 불사기사’의 정신을 환기한다면, 우리가 한시를 통해 퍼 올릴 수 있는 샘물은 무궁무진하다. 기갈에 바짝 타는 목을 축이고 더위에 찌든 몸에 상쾌한 등목을 해줄 수 있다. 가야 할 미지의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척으로 된 선인들의 이야기를 센티 자를 들이대어 재려고만 하니, 옛사람들은 길이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게 된다. 눈금을 호환해 읽을 생각은 않고, 연구자들은 문화의 차이나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최신의 서구 이론을 무작정 대입하는 연구를 낸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척으로 설명하겠다고 나선다. 그렇지만 미안하게도 그 이야기는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한시 연구에서 논문을 쓰자는 것인지 위인전을 쓰고 있는 것인지 분간 안 되는 연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애나 역사 배경을 주욱 늘어놓고, 거기에 작품을 꿰어 맞춰 일대기적 구성으로 재배열하거나, 자기가 연구하는 시인이 언제나 최고가 되는 당착은 고치기 힘든 병폐가 된 지 오래다. 툭하면 현실인식이고, 입만 열면 역사의식을 말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학성이 담보되지 않은 의식이란 대자보나 설교와 무엇이 다른가? 미의식의 부재는 문학성의 검증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가뜩이나 한문해독의 부담을 지고 가는 터에 미학의 잣대마저 흔들리니, 이번에는 아예 인치를 가지고 자척을 재려드는 격이 되고 만다.
우리야말로 ‘눈뜬 장님’이 아니었던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서구의 빛깔과 형상에 망상을 일으켜, 어느 골목이 바른 골목인지, 어느 대문이 제 집인지도 모르고 길가에서 망연자실 울고 있는 눈뜬 장님이 아니었던가? 아니 우리는 지금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울고 서 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설명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눈뜬 장님은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