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기사정리-동양조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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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경기사정리-동양조경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화면에 있어 한반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276년 백제인과 신라인에 의하여 한인지와 백제지가 만들어졌으며 323년에는 신라인이 자전제(茨田堤)를 쌓았다. 403년에는 천황이 우지선(雨枝船)을 만들어 반여에 있는 시기지(市磯池)에 띄워 황비들과 놀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농업용수의 목적으로 만든 물에 배를 띄우며 놀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485년에는 매년 곡수연이 배풀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왕희지의 난정고사를 본딴듯하나 곡수연이 있던 장소에 대한 설명을 없다. 506년에는 황궁에 못을 파고 원(苑)을 만들어 금수를 길렀는데 이는 백제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② 비조(아스까)시대 (593 A.D ∼ 709 A.D)
조경적인면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백제인 노자공(路子工)이 비조의 궁성 남쪽뜰에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수미산(須彌山)과 오교(吳橋)로 된 정원을 만들었는데 이는 조원에 관한 일본 최초의 기록이다. (일본서기에 기록) 구산팔해(九山八海)로 되어 있는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있다는 수미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고 이곳에 이르는 오교를 가설한것으로 보여지는 이 기법은 그 후의 일본경원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예로 일본의 경원에는 수미산석(須彌山石)을 세우고 지당(池塘)에 중교(中橋)를 놓는것이 전통처럼 되었다. 626년에는 한인 출신인 소아마자(蘇我馬子)는 자기집 뜰에다 소지(小池)를 만들고 못안에다 섬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섬대신이라 불렀다. 이 정원은 오늘날 한국의 중도형 지원(池苑)과 유사하다.
③ 내량(나라)시대 (710 A.D ∼ 792 A.D)
나라시대는 평성에 도읍을 정한뒤부터 전개되는데 평성경은 당의 장안처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되며 그 크기는 동서 5.7km, 남북 5km에 이른다. 나라시대는 백제왕의 후예인 행기가 불교전파와 토목사업에 크게 기여하고 당과의 교류도 활발한 때이지만 조경분야에서는 어떤 뚜렷한 기록은 없다. 다만 남지, 송림지, 서지궁등 경원에 관련된 명칭이 나타날 뿐이다. 1975년에는 S자 모양의 곡지를 발견하였는데 이 곡지의 남북길이는 40m, 연장 55m, 평균 나비15m에 이르는 규모이며 수면의 나비는 넓은곳은 5∼6m, 좁은곳은 2m이다. 수심은 평균 20cm이며 바닥은 찰흙으로 덥고 자갈을 깔았다. 수면과 육지부의 경계에는 둥근 돌을 한줄로 세워 윤곽선을 이루게 하였으며 이곳부터 5∼6°의 경사부분에는 납작한 돌을 깔았다. 이 곡지는 형상이나 경사도로 보아 곡수연의 목적으로 만든것 같다.
④ 평안(헤이안)시대 전기(793 A.D ∼ 966 A.D)
793년 환무천황이 수도를 평안경으로 옮긴뒤 평안시대가 열리었다. 평안경은 분지로 되어있어 가는곳마다 용천(湧泉)이 있고 풍부하게 흐르는 계천과 주위를 둘러싼 푸른 숲은 좋은 경관을 형성하였다. 이런 조건 때문에 귀족의 원림생활이 풍요로왔고 다채로운 문화가 탄생되었다. 조경적인 면에서 전기에는 煎시대에 이어 신선사상과 자연(해안)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경원(景園) 그리고 이들을 절충한 경원등이 꾸며정다. 대외적으로는 당의 건축문화가 도입되어 중기에 귀족의 주택양식으로서 침전조(寢殿造)양식이 완성되었으며 이에 상응하는 지원(池園)양식이 창출되었다. 후기에는 침전조양식이 정토(淨土)정원양식으로 발전해 갔는데 이것은 귀족불교가 대일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가지(加持)기도를 중히 여기던 밀교(密敎)에서 내세의 극락왕생을 중히 여기는 정토교로 옮겨갔기 떠문이다.
◆ 해안 풍경을 본딴 경원
- 하원원(河原院)과 육조원(六條院)의 경원 : 대신 원융은 그의 저택에 해안지방에서 가마솥에 해수를 넣고 끓일때 수증기가 나부껴 오르는 경관을 본따서 제염풍경을 연출하였다. 이곳은 원융을 중심으로하는 상류계급의 사교장이며 가회(歌會)의 장소이기도 했는데 이 제염풍경은 가흥을 붇돋아 주었고 귀족의 대표적인 경원(景園)으로 바다를 상징하는 못도 있었다. 원융이 죽은후 저택은 사찰이 되었는데 하원원경원이라 하였다. 또한 같은 무렵 풍류가로 유명하였던 보친이 육조원 뜰에 경원을 만들었는데 이 역시 해안풍경을 본딴 경원이었다.
◆ 신선사상배경의 경원
신선사상이 일본에 건너온것은 비조, 나라시대이지만 조경에 영향을 준것은 평안시대부터이다. 예를들어 794년 환무천왕이 평안성에 꾸몄던 신천원(神泉苑)에는 중도가 있고 차아천황의 이궁에 만들어진 대택지에도 천신도(天神島)와 국도(菊島)가 있었는데 봉영지(蓬瀛池), 봉래지(蓬萊池)라 하였다. 또한 899년에 만든 백량전(栢梁殿)도 한의 장안성에 만든 백량대를 모방하였다.
- 차아원(嵯峨院) 정원 : 차아원은 차아천황의 이궁으로 천황이 사망후 대각사가 되었다. 현재 대택지(大澤池)라는 감자 모양의 큰 못만이 남아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이 지원은 산골짜기에 흐르는 계류를 막아 만든것으로 농업용수의 관개지를 겸한 듯 하다. 못은 봉래지라고도 하는데 못의 북쪽에 천신도(天神島), 동쪽에 국도(菊島)가 있고 계류의 입수부에 백제인이 축조했다는 인공 폭포가 있다. 대택지의 뚝위에는 노수(老樹)와 가목이 무성하다.
- 신천원(神泉苑) : 경도시에 있는 금원으로 환무천황이 궁궐 건축과 함께 꾸민 것 같다. 동서 200m, 남북 400m의 크기를 갖는 원지(園池)속에 용신을 모시는 중도가 있다. 못의 북쪽에 익루(翼樓)가 있는 건임각이 세워졌고 이밖에 조전(弔電), 동전(潼殿)같은 당풍(棠風)의 건물은 못가에 세워져 있다. 이는 북쪽에 건축물, 남쪽에 지천(池泉)정원이라고 하는데 후대의 침전조양식의 기본형이다. 건임각(乾臨閣) 앞에는 많은돌이 있었으나 후에 법성사를 지을때 황폐해 있던 신천지에서 많은 돌을 운반했다고 한다. 수렵원으로 운영되던 수림에는 사슴, 여우, 토끼, 들새등이 키워지는등 상루 궁정인들의 사교장으로 수렵, 낚시질, 뱃놀이등이 이루어졌다.
- 조우전(鳥羽殿)의 후원 : 백하상황이 경도시에 조영한 조우이궁의 후원으로 못의 넓이는 남북 14m, 동서 10m이며 수심은 2.4m이다. 섬은 넓고 바다속에 있는것처럼 보이고 첩첩히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봉래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형을 볼때 중도가 있는 방장지(方狀池)이며 신선경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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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30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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